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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를 대하는 요가인의 자세

내 몸의 지표는 내 행복의 양과 비례한다

by 요인영



요가원에서 회원님들과의 주요 화제는 단연 다이어트, 특히 뱃살에 대한 이야기다. 두둑한 뱃살을 그보다 더 푸근한 미소와 함께 보여주시면 나도 뱃살로 맞불을 놓는다. 하나마나한 뻔한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장난으로 마무리를 하지만 마음 한편 찜찜함이 늘 남아 있다.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나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몸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시시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다이어트를 통해 살이 빠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살이 빠진 모습이 이전보다 추레하고 없어 보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근육이 덜 붙었거나, 체형이 내가 원하던 모습과 달라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내 몸의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체중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내 몸과 욕망,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과정이다. 여기서부터 인문학적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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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개별적이며, 다이어트의 출발점은 욕망이다. "살을 빼고 싶다"라는 말은 같아 보여도 그 욕망의 내용은 전부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병 때문에 붙은 살을 줄이고 싶다. 또 누군가는 출산 이후 무너진 몸을 다시 세우고 싶다. 또 다른 누군가는 거울 앞에서 군살 없는 내 모습을 마주하고 싶다.

욕망이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몸이 테두리'를 갖기 때문이다. 내 근육은 내 방식대로 반응한다. 같은 운동을 해도 어떤 이는 다리에, 어떤 이는 허리에 먼저 변화가 나타난다. 운동과 다이어트는 그래서 보편적 공식이 아니라 각자의 몸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성립한다.


이성은 늘 보편적 기준을 만든다. 표준 체중, 이상적인 몸매, 적정 체지방률. 그러나 현실에서 다이어트는 이 기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몸은 집단적 언어에 맞춰지지 않고, 늘 제멋대로의 리듬을 갖는다. 다이어트가 지루하고 괴로운 이유는 집단적 기준과 개별적 현실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넓은 의미에서 중복될 수 있지만 각자의 몸에서 실제로 발현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몸의 구조와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결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이어트의 본질은 남보다 예뻐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내 욕망을 존중하고 내 몸을 인정하며 내 변화를 긍정하는 것이다. 욕망-육체-개별성은 다이어트를 단순한 체중 관리가 아니라 개별자로서 나를 새롭게 세우는 사건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운동은 단순히 근육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호흡이 변하고, 기운이 달라지고, 기운이 달라지면 마음이 바뀐다. 다이어트는 결국 살만 빼는 것이 아닌 몸, 에너지, 마음이 얽혀 나라는 개별자를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 돼야만 하는 것이다.


주식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은 누구나 안다. 투자를 하려면 공부가 필요하고, 결국 자기만의 철학과 판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정작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몸을 다루는 일에는 왜 그 상식을 적용하지 않을까. 공부도 없이 남의 말만 믿고, 남들이 하는 운동을 따라 하고, 남들이 먹는 음식을 그대로 따라먹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삼는다. 주식에선 위험하다고 다들 아는 것을 다이어트와 운동에서는 너무도 쉽게 반복하는 것이다.


몸은 단기 수익을 노리는 투자가 아니다. 평생을 함께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산이다. 그래서 다이어트는 남의 매뉴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개별자에 맞는 투자의 철학, 곧 몸의 철학을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몸은 나만의 시장이고 운동은 나만의 전략이며 음식은 나만의 투자다. 다이어트가 성공하려면 결국 자기 몸의 흐름을 읽고, 스스로의 기준을 세울 줄 알아야 한다.


근육량이 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거기까지가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일 수도 있다. 해부학적으로 몸은 각자 다른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골격의 길이와 각도, 관절의 가동범위, 근육의 부착 위치와 형태는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조건이다. 예를 들어 같은 스쾃을 해도 어떤 이는 허벅지가 먼저 발달하고, 어떤 이는 엉덩이가 크게 반응한다. 그리고 최악은 근육이 아예 붙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근육량과 근력은 유전적 차이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이 유전적 한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후성유전학은 환경과 습관이 유전자의 발현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운동의 강도와 빈도, 영양 상태, 충분한 수면과 휴식은 근육 성장 유전자의 활성과 억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즉 같은 유전자라도 환경에 따라 몸의 반응은 달라진다. 내가 “더 이상 근육이 늘지 않는다”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후성유전적 관점에서는 아직 바꿀 여지가 존재한다.(늘 쓰는 말이지만 예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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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십까지 근육량 22, 체지방률이 20을 넘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내 몸무게의 두 배가 넘는 무게로 스쾃을 하고 네 배에 달하는 원판을 끼고 데드리프트를 수행했다. 보통 자기 몸무게를 훌쩍 상회한 무게를 들곤 하니 무게를 줄이고 휴지기를 갖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문제는 헬스와 달리기, 수영을 모두 수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거기에 가끔 요가원까지 다녔다. 난 내 체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근육량을 24까지 늘리고 싶었고, 체지방은 15까지 떨어뜨리고 싶었다. 대신 몸무게에 상한선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화계통이 좋지 않아(특히 담낭) 단백질 소화를 잘 시키지 못했고, 단백질 파우더는 비위가 상해 잘 먹지 못했다. 모든 음식에 sibo증상을 보이는 것 같았고, 가끔은 물도 맛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하프마라톤을 한다고 무리하게 페이스를 올리고, 거리를 하루에 5km씩 늘리기도 했다. 씻는다고 수영장을 가서는 뺑뺑이를 돌고 지쳐서 탈의실에서 잠든 날도 있었다. 그냥 미친 사람이었다. 그때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정해 놓은 대상 없는 모델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 이상향에 가까워지는 것이 목표였다.

면역력은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마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운동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아픈 게 말이데? 몸이 더 좋아져야지 말도 안 돼.' 이런 심정이었던 것 같다.


여성의 경우 체지방률이 낮아지면 몸의 생리기능이 멈춘다. 출산과 생식, 내분비 기능을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체지방률(18~22%) 유지해야 하며, 지방은 단순히 축적된 살덩어리가 아니라 생리, 면역, 감정 조절 등 복합적인 생체 반응에 필수적이다. 체지방률이 18% 이하로 떨어지면 생리불순이나 무월경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는 지방세포가 에스트로겐 등 핵심 호르몬의 재료이거나 생성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르몬 불균형은 신체 면역방어력 저하, 기분의 저하로도 연결된다. 운동 후 탄수화물 섭취를 제한하면, 뇌와 몸은 에너지원 부족 상태에 빠지고 세로토닌 등 신경전달 물질의 생산이 저하되어 예민감, 우울, 면역력 저하 등의 증상까지 동반될 수 있다.


척추와 골반이 비틀린 상태에서 하는 모든 운동 또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 무게까지 친다? 거의 자살행위다. 우리 몸은 발바닥을 기반으로 골반과 척추가 중심을 잡아 균형 있게 부하를 분산시키는 구조다. 하지만 알다시피 잘못된 생활습관 그로인한 불균형 등으로 척추와 골반이 비틀린 상태에서 체중과 운동 부하가 한 방향으로 쏠린다. 근막통합체인 우리 몸은 막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쉽다. 누가 옷을 한쪽 방향으로 과도하게 잡아당긴다고 상상해 보라. 한쪽은 팽팽히 당겨지고 한쪽은 늘어진 채로 힘을 잃는다. 거기다가 근막의 시작과 끝은 한방향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몸통을 회전하며 반대쪽에 부착되어 있다.





이제 다이어트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중요한 건 절대적인 근육량, 보기 좋은 몸이 아니다. 몸이 순환이 원할하고, 내장 지방이 적정하며(뱃살이 아니다), 뛸 수 있고, 허리를 굽혔다 펼 때 통증이 없으며, 관절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다이어트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다이어트와 운동의 성과는 결국 남과 비교한 근육의 양이 아니라 내 몸의 구조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얻어지는 '기능적 자유'다. 통증 없이 움직이고, 일상에서 내 몸을 온전히 쓸 수 있는 것, 다이어트는 숫자 게임이 아니라, 내 몸과 환경이 만나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이다. 내 몸의 한계를 인정하되 환경과 습관을 통해 유전적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핵심은 '자세히 살피는 능력'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대다수가 인식의 틀이 있다. 그 틀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자신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일단 '내 몸은 이렇다'라고 판단한다. 후에 어떠한 학습 없이 나와 '전혀 다른 대상과 접촉'한다. 여기에 더해 집요함까지 발동하여 그 대상에 오래 머무르게까지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능력'이란 내 몸의 범주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생리학적 지표, 움직임과 통증, 태도와 의미 세 층위로 나눠서 학습하는 것이다.


나의 몸을 학습하는 능력은 단순히 거울 앞에서 몸매를 관찰하거나 체중계 숫자를 기록하는 집요함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을 학습하는 태도다. '나는 원래 살이 잘 찌는 체질이야.'라는 판단은 지식이 아니라 편견이다. 반면 현미를 섭취했을 때 소화가 안되고 가스가 찬다, 쌀밥을 먹었을 때 소화가 잘 되고 몸이 가뿐하다.'라는 관찰은 지식이 된다.

다이어트는 피드백 시스템이다. 음식의 종류, 수면 시간, 운동 방식이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데이터로서 읽어내야 한다. 단순히 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실험실처럼 다루는 태도가 필요하다. 작은 변화를 시도하고, 결과를 기록하며, 다시 조정하는 과정, 이는 곧 내 몸을 하나의 살아 있는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다.

몸을 자세히 살핀다는 것은 곧 몸을 공부하는 일이다.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고, 스스로의 몸에 관한 이론을 세워보며,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것. 다이어트의 첫걸음은 바로 이 학습적 태도에서 시작된다.


몸을 학습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기존 습관의 저항을 뚫고 새로운 패턴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우리의 몸은 단순히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그 자체다. 그렇기에 새로운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뇌는 새로운 습관을 낯선 위협으로 인식한다. 신경 회로는 이미 익숙한 길을 따라가기 쉽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래서 다이어트는 언제나 의지력의 싸움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본질은 신경학적 재학습이다. 신경세포가 새로운 연결을 형성하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저항이 점점 줄어든다. 결국 다이어트란 습관을 학습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내 몸과 뇌가 새로운 가능성에 적응할 시간을 주고 그 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진정한 성공은 '학습을 통해 얻는 자유'다. 남이 정해준 기준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을 이해하고 스스로 세운 원칙 안에서 행동하는 자유. 내가 무엇을 먹을 때 소화가 잘 되는지, 어떤 운동이 통증을 줄이고 에너지를 북돋는지 알게 될 때 비로소 몸은 나의 편이 된다. 이 지식이 쌓일수록 억지로 참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속되는 생활로 바뀐다.

다이어트의 성공이란 외부의 칭찬이나 숫자의 달성이 아니라 '내 몸과 삶에 대한 이해의 확장'이다. 그 이해가 깊어질수록 나는 더 적게 아프고,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더 온전히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어깨를 외회전 하는 삶이란,
자기만의 독립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 내 몸의 지표는 내 행복의 양과 비례한다. 아주 두둑하다.



KakaoTalk_20250816_123922942.jpg 천마산, 2024











후성유전학, 삶의 실력 장자, 인요가 가이드에 기반하여 자유로이 해석하였습니다.

표제 이미지: Egon Schiele <Composition with Three Male Figures>, 1911

본문 이미지: 알렉산더 맥퀸, 케이트 모스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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