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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네트의 성실

게으름과 느슨함과 현재를 추구하는 일의 현상학

by 요인영




어떤 날은 일상이 평소보다 차분히 가라앉는다. 매일 조금씩 끝이 타들어가는 몬스테라, 손대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그대로일 블라인드의 위치, 비뚤어진 채 아무도 보지 않는 액자까지. 내가 손대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일 집 안의 풍경. 낡음과 무질서의 전조인 흩날리는 먼지들. 이 공기는 가을의 탓일 수도 아니면 부푼 게으름의 시간 탓일 수도 있다.


게으름은 나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묻는다면 존재의 두 가지 모드가 있음을 말해야 한다.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무위의 모드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으로 일에 개입하고 수행하는 노력의 모드다. 무위에 머무를 때 나는 사물과 시간의 변화를 방관한다. 그러다 이것이 지나치면 게으름과 포기가 일상을 지배한다. 반대로 치열하게 몰두할 때 나름의 질서를 세우고 무언가를 완수한다. 그러다 이것이 지나치면 완고해지고 집착에 사로잡힌다. 나의 일상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게으름은 단순히 무위의 한 형태로만 볼 수 없다. 게으름은 시간을 허락하고 흐름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먼지가 쌓이고 식물이 서서히 말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행위는 시간을 견디는 나만의 방식이다. 게으름 속에서 사물과 같은 속도로 느슨하게 흘러가고 그 느슨함을 타인과도 나눈다. 그래서 게으름을 타인과의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모든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니,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행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마른걸레로 먼지를 훔치는 단순한 동작은 노력이 아니라 멈춘 시간에 대한 나만의 사과이다. 무위와 노력 사이에는 작은 다리가 놓이고, 다리를 오가며 일상의 균형을 맞춘다. 먼지를 닦고, 화분을 돌보고, 액자를 바로잡는 사소한 일을 통해 삶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대청소를 하였습니다.라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해 보는 것 또한 단순한 행위를 글쓰기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의 모드이다.




많은 관계 속에서 흔들리며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지만 소속되기를 거부하는 성향이 내 안에 깊게 새겨져 있다. 포섭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살아왔다. 겉으로는 비교적 성실한 낯을 하고 있지만, 성실한 척을 해야 할 때마다 진저리가 난다. 성실이라는 단어에 단 한 번도 반감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단 한 번도 성실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어거지로 살아가는 사람 같다. 나는 매일 아침 보이지 않는 실에 묶여 깨어난다. 누군가 실을 당기면 몸을 일으키고, 또 다른 손길이 스치면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난 이 상태를 마리오네트의 성실이라 이름 지었다. “보이지 않는 조종자에 의해 움직이며 자유 의지와 통제 사이의 긴장 상태를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단순히 나태의 반대말도 아니고, 성실의 가면을 쓴 위선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타율적 규범이 신체 안으로 들어와 연극처럼 재현되는 기묘한 상태다.


마리오네트의 성실은 무섭도록 자연스럽고 정밀하다. 실은 보이지 않지만 그 실이 당겨지는 순간마다 나는 기계처럼 반응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실은 무게를 드러낸다. 어딘가 기형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웃을 때 근육은 부자연스럽게 실룩거린다.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이 무대에서조차 한 시도 쉬지 못한다. 무대 조명이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사회의 강요라기보다 시간이 만든 흔적에 가깝다. 수많은 아침을 성실히 일어났고, 수많은 저녁을 피곤하게 마쳤다. 그 축적이 내 안에서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성실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이라기보다 시간의 습관으로 굳어져 있다. 마리오네트의 실은 과거가 남긴 흔적이며, 나는 그 흔적에 끌려 오늘도 움직였을 뿐이다. 성실은 인간 존재가 세계와 맺는 가장 오래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다. 세계는 늘 어떤 응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몸으로 대답하며 살아왔다. 성실은 그 대답의 흔적이다. 마리오네트의 실은 외부에서 온 것도, 내부에서 자란 것도 아니다. 실은 곧 나와 세계를 묶어온 관계 자체이기도 하다.


성실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동시에 소진시킨다.

역설적인 것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연극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우르드바 다누라.png 우르드바 다누라아사나



요가의 고난도 자세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재에 집중하여 몰입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련이다.

어떤 자세들은 그간의 내 몸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활처럼 휜 몸을 유지하기 위한 근육의 협응과 미세한 움직임은 '지금, 여기'에 완전히 몰입하는 경험이다. 자세에 몰입하면 할수록 주변의 공간은 확장되며 느슨해진다. 이것의 몰입의 부수적인 효과이다. 긴장과 이완 사이에서 모든 목적 없는 사소한 것들이 펼쳐지고 느슨함 속에서 존재를 깨닫고, 삶을 현상학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르드바 다누라는 극단적인 형태 속에서 느슨함을, 마음과 몸의 현재를 깨닫게 해 준다.

본질은 과도한 유연성으로 허리를 꺾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열어 공간을 확장하는 것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갇혀 있다.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부드러운 손길을 내미는 순간,


곧 사라질 소소한 것들을 문장 속에 담는다.


모든 흘러가는 것들에 무의미한 눈길을 보내며, 잠시 머문다.


현재를 추구하는 마음은, 지금 여기의 사소한 것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문학은 이런 순간들을, 빈 공간과 멈춤과 여백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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