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라는 거대한 요가매트 위에서
희한한 습관이 하나 생겼어.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거야.
앞서 걷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생활습관을 유추해.
그렇다고 내가 그 틀어진 자세를 잡아줄 만큼의 실력은 안되고.
언젠가는 다른 이의 몸을 쓰임새 있게 돌려줄 날이 올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니 그만 좀 보라고.
눈동자 굴러다니는 소리 다 들린다. 들려.
여긴 스레드가 아니니까.
옆 사람만 들리게 작게 말할게.
앞면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뒷면에 다 쓰여 있다고!
틀어졌다고 뻣뻣하다고 안된다고 그래서 이제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나의 시선이,
자세를 다시 스케치할 수 있는 기술이 되기를.
몸이 자신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구조를 함께 그려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Tensegrity
막대기와 케이블로 만든 기묘한 구조물. 막대들은 서로 닿지 않지만, 전체는 무너지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 구조물은 강철보다 가벼웠고, 건축물이라기보다 생명체에 가까웠다. 만든 이는 이 원리를 텐세그리티 tensegrity라 불렀다. 이는 긴장 tension과 통합 integrity으로 만든 단어.
전통적인 건축은 중력을 견디는 기술이었다. 하중을 기둥이 버티고, 무게를 아래로 흘려보내는 방식. 텐세그리티는 정반대의 사고였다. 구조를 지탱하는 힘이 압축이 아니라 긴장 속에 존재했다. 케이블이 장력을 유지하는 한 막대는 쓰러지지 않는다. 서로 닿지 않은 부재들이 장력으로 연결되어 전체의 균형을 유지한다. 안정은 고정이 아니라 균형 잡힌 긴장에서 나온다.
구조의 아름다움은 완전한 대칭이 아니라, 역동적 균형 속에 있다. 이 개념이 생명체로 옮겨오면 바이오텐세그리티 biotensegrity가 된다. 뼈는 압축 부재, 근육과 근막은 장력 부재다. 인체는 뼈가 뼈 위에 쌓인 탑이 아니라, 긴장과 압축의 망으로 떠 있는 건축물이다.
한 부위가 움직이면 다른 부위가 응답한다. 손끝의 미세한 움직임이 어깨를 바꾸고, 어깨의 각도가 척추의 만곡을 조정한다. 어떤 부분도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움직임은 전체 구조의 재조정이다.
이것이 인사이드플로우(요가의 한 종류)에서 말하는 긴장과 압축의 정렬법이다. 요가의 동작은 유연성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긴장 네트워크를 조율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신전이나 굴곡을 넘어, 각 부위가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위해 작용한다.
요가의 자세가 단단해질수록 그 내부에는 더 미세한 긴장감이 흐른다. 밀기와 당기기, 열기와 닫기, 확장과 수축. 상반된 움직임이 동시 존재하는 세상. 몸에 닫힌 원이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운 텐세그리티가 형성된다. 그건 하나의 구조가 스스로를 세우는 순간이다.
암밸런스가 텐세그리티 구조의 정점을 보여주는 꽃이라면, 수리야 나마스카라는 그 긴장을 길러내는 태양의 순환이다. 암밸런스는 정지된 형태 속의 긴장, 수리야 나마스카라는 흐름 속의 정렬이다.
하나는 형태의 텐세그리티, 다른 하나는 시간의 텐세그리티다.
암밸런스 arm balance는 팔로 균형을 잡는 요가 아사나를 말한다. 팔이라는 좁은 기반 위에 전신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동작이다. 팔꿈치, 손목, 견갑, 복부, 다리 전부가 압축과 장력의 균형선 위에 정렬되어야 가능한 자세이다. 팔뼈는 압축을 담당하고, 근막과 복부, 허벅지, 척추의 연결망은 긴장을 유지한다.
바카아사나(까마귀 자세)를 보면, 손바닥은 땅을 밀고, 복부는 팔꿈치 위로 살짝 떠오른다. 몸은 지면에 닿지 않지만, 결코 불안정하지 않다. 압축과 장력이 정밀하게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유기적 아치를 만든다. 이때의 균형은 중심을 고정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흔들리며 중심을 갱신하는 살아 있는 안정이다.
암밸런스는 중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분산시키는 기술이며, 단단한 근육보다 정확한 연결감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외적으로 정적이지만,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균형을 잃은 듯 유지하는 그 미세한 흔들림이 바로 생명의 리듬이다. 요가에서 이 자세는 힘으로 버티는 자세가 아니라, 불안정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수행이다. 텐세그리티의 철학이 몸으로 드러난 상태다.
몸이 수직으로 세워졌다가 수평으로 열리고 다시 곡선으로 흐른다. 이 유기적인 흐름은 하나의 중심축을 잃지 않은 채 일어난다. 중심은 뼈의 축이 아니라 장력의 균형이 만든다. 이것이 수리야 나마스카라, 태양 경배 자세이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일출의 온도 속에서 몸의 각 부분이 다시 서로를 기억해 내는 시간.
한 번의 흐름 안에서 긴장과 이완, 압축과 확장이 끊임없이 교대한다. 각각의 동작은 서로를 지탱한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밀어내면 어깨에 기대지 않게 되고, 그 힘은 척추로 흐른다. 다운독에서 플랭크로 이어질 때 몸은 팽팽히 당겨지고, 차투랑가에서 모든 긴장은 한 점으로 응축된다. 코브라에서 그 응축은 다시 열림으로 전환되지만, 장력은 끝까지 유지된다. 발 끝으로 서며, 발 끝을 굴려 다운독으로 돌아온다.
이 흐름 전체가 하나의 텐세그리티 구조다. 힘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모든 근막과 관절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미세한 조화가 전체의 안정으로 이어진다. 균형은 정지에 있지 않고, 흐름 속에서 매 순간 조정되고 안정된다. 수리야 나마스카라는 몸의 텐세그리티가 시간 속으로 확장된 형태다. 몸이 장력과 압축으로 질서를 유지하듯 삶 또한 관계와 변화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찾는다.
텐세그리티는 건축이나 생체역학의 원리로만 볼 수 없다. 삶에서도 똑같은 법칙이 작동한다. 인간의 안정은 고정된 중심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와 욕망, 한계와 유연성 사이의 긴장된 조화 속에서 생긴다. 몸이 긴장과 압축의 네트워크라면, 삶은 의미와 불안의 연속체이다.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열면, 다른 쪽에서는 지탱해야 한다. 어떤 것을 원하면 동시에 욕구와 결핍이 검게 기지개를 켠다. 평소에는 알 수 없던 결함이 두드러지고 필요가 눈을 밝힌다.
몸의 구조가 긴장 속에 서 있듯 삶 또한 균형을 잃지 않으려 팽팽히 유지된다. 요가가 균형의 언어라면, 행위는 그 긴장의 아슬아슬한 내면이다. 사로잡힌 자에게 평온이란 없다. 숨 쉴 틈이 있다면, 그 사로잡힘은 거짓이다. 글이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면, 당신은 아직 작가가 아니다. 행위는 언제나 기시의 자리에서 태어난다.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매달림, 그것이 삶이자, 나의 요가이며, 몸이 자신을 세워가는 텐세그리티다.
요가는 잘 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야.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요가매트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흔들리며 균형을 찾아가고 있어.
이미지: 바카사나, 표지이미지, 수리야 모두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