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사랑받고 자랐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헌신했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에 보답하고 싶었고 효도하고 싶었고 잘하고 싶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고 착한 딸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
큰 부딪힘 없이 살아온 36년
결혼이란 인생의 큰 결정 앞에서 나와 나의 부모는 충돌했다.
그들이 원하는 기준과 행복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부정당해야 했고
나의 선택에 대한 믿음과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이 결혼에 대한 반대로 시작되었으나 이 시간을 겪으면서 나는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자신들의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그들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를 무시하고 나를 통제하려고 하는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모님은 이 부분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나를 평생 사랑하고 아껴준 부모님을 상처 주는 일은 나 역시 굉장히 힘들고 아픈 일이었다.
부모님에게서 더 이상 보지 말자는 최후의 통첩을 받았을 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사랑하는 딸의 생각과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하는 마음과, 나를 너무 사랑해서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라도 해서 나를 막고자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그래서 미안했고 아팠고 죄송했다.
그래서 나를 상처주어도 나는 상처 주지 않았다.
한번 뱉은 말은 주어 담을 수 없기에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번만 나를 믿어달라고, 봐달라고, 잘하겠다고 빌었다. 엄마에겐 울면서 빌었고, 아빠에겐 편지로 빌었다.
그리고 3일.
나는 내가 드린 편지와 어버이날 용돈 봉투를 등기우편으로 회사에서 돌려받았다.
서류봉투에는 편지와 용돈 봉투뿐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다른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봉투를 2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빠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나에게 강력하게 전달하는 중이었다.
'나는 너의 생각을 반대해, 나는 너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나는 너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아'
더 이상 부모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퍼부은 상처 주는 말들을 듣고도 그래도 내 부모니까, 그래도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니까 하고 나를 다독이고 밤에 울면서 쓴 편지였다. 한 번만 이해해달라고, 봐달라고, 잘하겠다고, 또 만나러 오겠다는 편지였다. 그런데 아빠는 그걸 나에게 돌려보내는 행위를 통해 "거절" 했다.
어떻게 이렇게 독할 수가.
아니 지독할 수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나 때문에 괴로워 죽겠다면서, 내가 그렇게 안타깝고 아프다면서, 정작 가장 상처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자신의 거절, 자신의 분노, 자신의 거부 표시를 분명하고 하고 싶어 굳이 우편을 보내는 수고스러움을 겪어가면서까지 나에게 등기를 보냈겠지.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
이미 나에게 더 이상 볼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 최후의 통첩을 한 상태, 이미 나에게 상처를 줄대로 준 상태, 부모가 나의 선택을 거부하고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인데, 내가 쓴 편지와 내가 드린 용돈 봉투를 돌려보냈을 때, 그리고 그것을 회사에서 받아보는 나의 심정은, 나의 마음은, 나의 상황은 전혀 안중에도 없구나. 참 지독하다. 내가 상처받는 것은, 내가 힘든 것은 알바 아니었구나. 그게 아빠의 사랑이구나.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진행해 오는 시간 동안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좀 더 잘난 딸이 되었으면 좋았을 걸, 좀 더 잘난 사위를 데려갔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나에 대한 비난과 아쉬움을 나 스스로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점점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를 키워준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옳으냐 묻는다면 내 가치에서는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비난하거나 나를 아쉬워하거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를 상처 준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그들을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말을 삼가고 삼가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가 상처받는지 모르는 건지, 내가 자신들을 상처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지 더 지독한 행동으로 나를 옭아맨다. 나는 끝까지 그들에게 다른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참을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