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근육 20
결국 운동을 시작했다. 서른이 넘으면서 도저히 자력으로 버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프네' 정도가 아니라 '병원에 가봐야 하나?'라는 말을 더 자주 하고, 영양제 숫자가 더 늘어 거의 하루에 10알 정도 먹는 것 같다. 몸이 제 멋대로 안되니 그건 그것대로 스트레스가 되어 불면증도 찾아오고, 난생처음 갑자기 퓨즈가 꺼지듯 잠이 들어버리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여유'라는 것이 핏줄을 타고 흘러 심장 한가운데 아로새겨진 인간이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기 전 벌거벗은 몸을 거울 앞에 대보곤 눈물이 나기도 했는데, 저 미지의 우주에 나가 같은 종족을 찾는 것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입으로 마스터한 운동은 벌써 수십 개였다. 권투를 했다면 스파링을, 수영을 했다면 자유형 마스터를, 요가를 했다면 아사나 몇 개는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겠지만 간판으로만 읽으며 지나간 지 여러 해였다. 아니, 삼 년 전쯤 뜬금없이 '방송댄스'를 시작한 적이 있긴 하다. 점심메이트인 회사 동료 두 명과 함께 냉우동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그때도 역시나 '아가리 스포츠맨십'이 충만했던 내가 먼저 제안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내가 제일 몸치라는 사실만 인증했다. 선생님은 자주 나를 앞 줄에 세웠다. 마주 선 거울 앞 나의 춤사위는 뭐랄까... 춤이라 할 수 없는 어떤 괴로운 몸짓, 수치스럽고도 어색한 고문에 지나지 않았기에 왕왕 선생님 몰래 눈을 질끈 감았다. 블랙핑크의 'Love Sick Girl'이라는 곡에 맞춰 일주일에 2번 점심시간마다 몸을 흔들어제꼈는데 후렴구를 갓 넘어, 이제 제 속도로 딱 한번 돌려본 다음 날 그만두었다. 갑자기 이석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비인후과에서 교정을 위해 사정없이 고개를 돌릴 때 실소가 터졌다. 건강하려고 하는 운동에 병을 얻다니. 주동자가 떠난 댄서 동맹은 쉽게 무너졌는데, 한 동료는 임신을, 다른 한 동료는 혼자 춤을 추러 다닐 만큼의 열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최근 '스우파 2(스트리트우먼파이터 2)'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건이다.)
다시 운동을 결심한 건 작년 말 즈음. 팅팅 부은 눈으로 주 3일 이상 택시를 타고 다니던 시기에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접하게 된다. 바로 택시비 인상. 그리고 올해 초 내 연봉은 동결되었다. 팍팍한 삶 속에 삐걱대는 관절을 주무르며 결심한다. 경제적인 몸이 되자. 아쉽게도 긴축에 긴축을 거듭하던 회사가 올해부터 6만원짜리 '체력단련비'도 일시 중단한 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필라테스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다. 10년 만이었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했지만 처참히 무너졌다. 그래도 스물셋엔 복근에 줄이 가는 경험도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여전히 외계인 몸뚱이다. 그래도 하나 배운 건 꾸준히 하는 것.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내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플랭크를 1초도 못 버텨 도망가고 싶었던 때가 지나 이제 1분 정도는 너끈히 해내고, 10회 세트를 2,3회 만에 포기하고 나뒹굴던 시기는 온데간데 없이 이제 7,8회까지 악으로 깡으로 버틸 줄 알게 되었다. 물론, 여기엔 경제적인 측면도 있다. 거금을 들여하는 운동에 결석은 어림없다. 종종 시간이 맞지 않아 아침 8시 첫 타임에 갈 때도 너무 새롭다.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DNA가 내 안에도 있었다는 것이. 어른이 되어 만들어진 강제적 성실함이라도 관계없다. 먹고 싸는 일에만 충실한 줄 알았던 내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서른 중반이 되어도 즐거운 것이었다.
그중 내가 늘 재밌어하는 부분은 필라테스의 오묘하고 생경한 언어 표현들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척추를 하나하나 쌓아 올리세요', '꼬리뼈부터 떼어내세요', '갈비뼈를 닫고', '정수리는 앞에서 뽑아내고 다리는 보이지 않는 벽을 밀어내는 느낌으로', '골반에서 다리만 뽑아내세요', '배꼽을 등 뒤로 보낸다', '가슴을 골반에 갖다 붙여야 해요.' 어떻게 들으면 무섭고, 어떻게 들으면 놀라운 표현들이 더 신비로운 건 정말 그대로 하면 자세가 나온다는 것이다. 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거짓말 같지만 진짜다. 매번 중요하다고 하는 그놈의 '코어(Core)'가 어딘지도 이번에 정확히 알았다. 인체라는 것이 이렇게 늘리고 저렇게 굽히는 것이 가능했구나. 나는 아주 오래 갖고 놀았던 로봇 장난감에 숨겨져 있던 날개를 발견한 기분이다. 운동 이런 맛에 하는 거구나.
명사와 동사의 자유분방하고 다채로운 믹스매치를 듣고 샤워를 하는 동안 대체로 나는 나의 글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쓰는 근육을 키워왔을까. 현생과 체력, 감정의 소모에 치여 빼먹기와 뛰어넘기를 반복하던 게으른 나날을 돌아본다. 꾸역꾸역 해내는 운동만큼 해낸다면 나의 '쓰는(writing) 근육'도 늘어났을 텐데. 사는 동안 전혀 몰랐던 단어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쓰는(using)' 바운더리도 넓어졌을 텐데. 그러나 몇 달 동안 줄지 않는 나의 체지방과 늘지 않는 나의 골격근을 보며 말 그대로 '뼈저리게' 느낀다. 아, 글이라고 다를쏘냐. 어깨에 힘을 빼고 정수리를 있는 힘껏 뽑아 허리가 아닌 단전 중앙에 힘을 빡 주고 한 자 한 자를 있는 힘껏 쓰는 일. 비록 순식간에 일필휘지에 대단한 필력을 갖진 않겠지만 역시나 쓰고 쌓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늘지 않을까. 그것을 나는 계속해보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2023. 9. 1.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