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lolife Jan 17. 2021

나의 퍼진 팥칼국수

임신 때 그렇게 좋아하는 '팥칼국수' 생각이 자주 났다. 물론 팥죽을 한 트럭 정도는 먹어야 해롭다는 말도 있었지만, 임신 중에 특히 조산기가 있을 때는 뭐든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좋지 않다는 건 먹지 않았다.


출산을 하고 조리원에 가니 매일 밤 간식으로 죽을 주는데, 팥죽을 줄 때 그 어떤 음식보다 설레었던 것 같다. 드디어 팥죽을 먹는구나. 오랜만에 먹는 조리원 팥죽은 달달하니 맛있었지만 엄마가 해주는 우리 집 진한 팥죽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을 한 후 엄마와 떨어져 산지 10년이 넘었는데, 엄마 음식이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팥칼국수였다. 서울에서는 팥죽집이 흔하게 보이지는 않아서, 남편과 데이트를 하다가 팥죽집만 보이면 먹고 싶다고 들어가서 먹어보아도 엄마가 해주는 그 진한 팥이 아닐 때 실망하는 적이 많았다. 진한 팥에 쫄깃쫄깃한 면발이 담긴 따뜻한 그릇에 달달한 설탕을 솔솔솔 뿌려 먹으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소화가 잘되는 엄마표 팥칼국수가 늘 그리웠었다. 타지 생활을 하면서 고향집에 내려가는 건 명절 때 뿐이어서 명절 때 팥칼국수를 해달라고 하는 건 음식 준비를 하시는 엄마가 힘드시니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엄마와 공동육아를 하며 좋은 건 그 팥칼국수를 자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팥칼국수를 먹을까? 하는 말처럼 설레는 문장을 좀처럼 찾기 힘들다. 면의 생명은 퍼지지 않게 제 때 먹어야 하는데 육아 중에 라면 하나도 퍼지지 않게 먹는 게 정말 힘들다.


그런 우리가 팥칼국수를 먹는 건 모험이다. 우선 모든 집안일을 마친 후 팥을 삶고 믹서기에 갈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면을 잘라야 한다. 그런 다음 간 팥을 끓인 후 면발을 넣은 후 적당히 익으면 그릇에 담아 후루룩 먹어야 한다. 아이들 둘을 내가 담당하면 엄마는 재빠르게 팥까지 끓이신다. 문제는 우리가 면발을 불지 않게 먹을 수 있는 타이밍이다.

둘이 겨우 동시에 잠에 들어서 면을 딱 넣고 끓인 후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들면 한 아이가 잠에서 깨 울기 시작한다. 혹시나 그 울음소리를 듣고 다른 아이가 깨면 우리는 둘 다 퍼진 팥칼국수를 먹을 운명이다. 다시 돌아온 식탁엔 약간 식어서 굳은 팥죽에 면이 뚝뚝 끊어진다. 정성껏 만든 팥칼국수가 퍼져버려 엄마는 실망하지만 나는 퍼져도 맛있다며 엄마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 본다.



우리 아이들이 어서 자라서 같이 식탁에 앉아 팥죽 한 그릇 호호 불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그 퍼진 팥칼국수가 우리 아이들과 함께 먹을 팥죽이라고 생각하니 식은 대로 또 맛있다. 비록 지금은 퍼진 팥칼국수를 먹지만 곧 머지않아 따뜻한 팥죽을 먹는 시간이 보장되는 식탁 풍경을 상상하며 이 또한 견뎌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칼국수 한 그릇이 떠오르는 겨울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금쪽같은 내 세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