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화훼 공판장에 가는 시간

간간히, 꽃을 사줍니다.

꽃을 좋아하긴 하지만

내 돈 들여 꽃을 거의 산 적이 없고

막상 꽃 선물을 받아도

격하게 좋아한 적이 없었다.


'꽃은 시들면 그뿐. 이왕이면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을 주오.' 하는 마음이었다.


꽃에 대한 감흥이 크게 없었으나, 처음으로 꽃을

접하게 되었던 건 일요일마다 꽃집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였다.


#꽃집아르바이트


꽃집 사장님께 고용되었으나 일요일에만 대 교수회관 결혼식장에 출장나가 생화 꽃장식을 도왔다.


큰 틀은 다 짜여있고 빈 곳 틈틈이 배당된 꽃들을 꽂았다.


백합의 수술의 꽃밥 따는 것도 주 업무 중 하나였다. 순백의 백합 꽃잎에, 샛노란 꽃밥 꽃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흔적도 없이 처리하는 것. 집중력과 기술력을 요하는 업무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결혼하는 뇌섹 커플들을 부러워하며 물끄러미 바라다. 식이 끝나면 꽃장식을 거둬들였다가 다음 커플들을 위해 새로운 꽃들을 조금씩 채워 넣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상태가 안 좋아 다음 주 결혼식에 쓰이지 못할 꽃들을 얻었다. 시든 꽃들이어도 고시원 방 한 켠에 꽂아두 작은 방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쿰쿰한 기운이 가시는 듯했다.


그 후부터 가끔 양재동 꽃시장과 고속터미널 꽃시장에 어슬렁 배회하였고 간간히 가난한 서울 자취생 살림에 꽃 사치를 허락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든 고시원 방 안에 꽂힌 꽃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 묻은 손 위에서 잠시 타오르던 찰나의 빛 같이 잠시 빛났지만 한 단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꽃 시장에 가기 전, 늘 발걸음이 총총. 레었다. 대단하게 많고 비싼 꽃을 고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우받는 느낌이 들게 했다.


#난임

#꽃수업


하루아침에 30대 초반에, 40대 중반이라는 난소 기능 수치를 받아 들게 되었다.


0.87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받아 들고 고용량, 고비용 과배란 주사로 쥐어짜도 안 나오는 난자에 눈물 흘려가며 난임 병원에 들낙거렸다.


동시에 실업자 신분을 얻고 대신 국민 내일 배움 카드를 발급받게 되었다. 직업 훈련 삼아 꽃수업을 듣기로 했다.


계좌제 수업으로 듣는 꽃 수업은 전혀 우아하지 않았다.


출석을 제때 체크하지 않으면 지원 수업료를 뱉어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지각 횟수와 맞바꿔야 하는 교통비도 아쉬웠다. 꽃을 아껴 써야 한다는 직업 전문학교 지침에 따라 꽃은 돌려쓰고 잘라 썼으며 꽃잎이 문드러지고 줄기가 너덜 해질 때까지 습했다.


하지만 '나는 한 송이의 꽃도 피워내지 못하는 메마른 나무인 걸까', 수업 중에 청승맞은 눈물을 후둑 거리면서도 꽃에게서 늘 위로받았다.


거친 잎을 훑어내면서 걱정도 쓸어내 버렸고 뾰족한 가시를 쳐내면서 앙칼진 마음을 뭉하게 했다.


#화훼공판장


난임 책을 내고 북토크와 세트로 꽃 수업을 하게 되면서 난 좀 더 공격적으로 화훼 공판장에 드나들게 되었다.


구 지원 사업으로 아이들 대상 꽃 수업을 하면서 꽃가게 장부 한 켠에 이름도 달아놨다.


내 돈으로 사는 꽃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마음으로 사꽃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늘 풍성하고 다양한 꽃들을 랐다.


하지만 꽃을 고르기 전에 늘 '이 꽃 오래가나요?'질문했다.


형형색색 화려하지만 꽃잎이 부스러지듯

빨리 시드는 꽃 말고,

꽃시장에선 선명하지만 불과 몇 밤 사이

제멋대로 늘어져서 관리하기 어려운 꽃 말고,

향이 자극적으로 풍성한 꽃보다 그윽하게 은은한 꽃을 랐다.


손이 덜 가면서도,

두고두고 눈에 담을 수 있을 겸손한 꽃.


호불호가 심하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잘 어우러질 무난한 꽃들을 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여러 꽃들을 나눠주고

똑같은 설명으로 꽃을 꽂보시라 말했다.

나름의 지침을 줘도 저마다 다른 화형이 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엇비슷하게 주어진 꽃로도, 저마다의 개성으로 제각각의 화형을 만들어내고 색다른 조합의 색감을 꾸려도 괜찮다.


모두들, 각자 만든 꽃을 한 아름 안고 면면히 웃음 띄우며 돌아가는데... 그 뒷모습에서마저도 경쾌한 표정 읽어졌으니까.


수업 후엔, 남은 꽃 들고 와 딸과 도란도란 꽃꽂이를 하고 낮엔 거실에 두었다가 저녁엔 침실로 옮겼다가... 꽃을 오래오래 봤다.


#현재


수업이 없어도 종종 화훼 공판장에 간다. 목적 없이 꽃을 사고, 꽃을 본다.


꽃에게서 명랑한 기운을 얻고 그 우아함을 아이들과 함께 나눈다.


꽂아둔 꽃을 동화책에서라도 발견하고서 친구를 만난 듯 서로 반가워한다.


올망졸망 꽃을 보는 똘망한 눈, 꽃잎을 떼어내고 가지를 자르 꽃을 꽂는 작은 손, 그 와중에 간간히 꽃 향기 맡는 걸 잊지 않는 앙증맞은 코. 꽃과 노는 아이를 지켜보는 평화로운 시간 즐긴다. 감도는 공기마저 향기로운 시간.


행복은 물건이 아니라 취향에 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걸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면 행복해진다.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











이전 07화 춤에 자유로워지는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