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성향과 취향에 맞게 동선을 짤 수 있는 축복

<SNS일기>


나의 내소사 답사는 항시 멀찍이서 대웅보전의 시원스러운 자태를 엿보다가 돌계단에 올라 아름다운 꽃창살의 묘미를 읽는 것으로 끝난다.


꽃창살의 사방연속무늬는 우리나라 장식문양 중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호우주의보 속에서도, 절에는 꼭 들르는 집입니다.>



꼭 더 아는 척하려 하는, SNS 멘트. 하지만 없는 관심을, 있는 척하려고 꺼내어드는 것은 아니다.


난임의 일상을 걷는 동안, 불교 대학에 다녔고 한국사 능력시험 1, 2급 / 3, 4급을 땄다. 출산과 육아의 일상을 달리는 동안 나의 한국사 능력은 다시 제로 베이스가 되었을 테지만. 지금도 내 여행 코스에는 늘 사찰이 우선순위에 있다.


지금의 남편은, 동네 술집에서 자매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던 나에게 '유홍준 문화유산답사기' 책에 전화번호를 써서 건넸.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기 전, 책 앞표지에 적혀있던 필체를 유심히 눈에 담았다. 우리 연애의 매개체가 되어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유홍준 교수의 특강이 있는 때면 굳이 찾아서 가는 편이다.


사람에게 성향과 취향이라는 게 확실히 있는 모양이다. 평소 내 발 길이 닿는 곳을 보면 집 앞 산책길을 걸어, 동네 도서관에 닿거나 어깨나 허리가 아픈 날엔 옆 동네 한의원에 가거나. 그리고 시시때때로 요가원이나 필라테스 스튜디오. 내 발길이 닿는 동선은 거기서 거기이다. 지금은 빵과 커피를 끊으려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5천 원으로 얻는 큰 행복, 카페도 나의 히든 플레이스 중 하나이다. 아주 가끔 동네 엄마들을 만나고, 또 가끔 친구들을 만나지만 미술 심리를 주제로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만나는걸 더 선호한다. 그날그날 여러 사람들의 그림 검사들을 떠올리며 아직 시답지 않지만 분석이라는 것도 해보고 과거까지 거슬러가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한 공부도 해본다. 다른 이의 신변잡기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흠을 찾고 그 안에서 왜곡된 희열을 느끼려는 게 아니라, 미술심리공부를 통해 내 마음을,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부하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 그렇다.


1학기 마지막 영어 수업이 오늘로써 끝났다. 육아 일상 속 아이들과 24/7 부대끼는 시간들이 버겁다고 하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아이들 속의 나는 의외로 업된 텐션일 때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가는 일주일 2번의 길이 설고 돌아오는 길에 활력 넘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내 주변의 누군가 '보따리장수'라며 폄하하던 일이어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면 그뿐. 


갓 학부모가 된 주부 엄마의 토막 시간에서, 의무감으로 숙제하듯 해야 하는 시간들을 빼면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꽉 채워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종종 애가 타고 화가 난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꽉 채워서 살아도, 늘 해야 하는 일거리는 던져지는 법이어서 가끔 도망가고 싶다. 언젠가부터 내 통화목록에 가득 차 있던 요양보호사, 방문간호센터장, 병원 진료 관련 문자 등은 싹 지워버리고 그 속에서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시시콜콜한 것들로 내 집중력을 흐트러트리고 원치 않은 것들이 내 마음속에 파고들고, 물리적으로 내 시간을 앗아가는 것들은 왜 이렇게도 많은 건지


지금의 나는 그렇다. 나를 위해 쏟는 시간과 공력이 아쉬워 자주 애가 닿는다. 시간과 에너지가 넘치고 넘쳐 다른 이의 일상을 힐끗거릴 수 있고 그의 사생활을, SNS 탐색하 훑을 여유가 있는 누군가가 미치도록 부러울 지경이다.


간접적으로라도 하루하루 생과 사를 넘나들다 보니 저는 소소한 일상 한 자락, 한 자락들이 소중한데... 내 안의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쏟을 에너지가 있으신가요?

부럽고, 부럽습니다... 아직 살 만하시군요.
그 시간을, 그 여유를, 제가 사고 싶습니다.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SNS를 하지만, 정작 다른 이의 SNS를 보는 시간은 많지 않다. 사정을 뻔히 아는 동생의 독일 라이프도 부럽기만 하고 때로 배가 아파서 안 봤던 마당에. 뭐 하러 부러움을 살 일인가 싶어서. 그 시간에 아이들과 유럽과 관련된 동화책을 읽었다. 그리고 들숨, 날숨처럼 '엄마는 너희들과 꼭 가고 싶어.' 말했다. 자유롭게 유럽을 여행하던 20대의 어느 때를 추억하고 아이들과 함께 갈 40대, 50대를 무턱대기약했다.


어느 아침을 기점으로, 1년 넘게 병원에서 생활하게 된, 재활에 힘겨워하고, 그 속의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버거워하던 인어공주가 말했다.


나는 자유를 뺏겼어...


이렇다 할 투덜거림 없이 묵묵히 재활치료를 감내하던 그녀였던지라 적지 않게 놀랐다. 담담하게 뱉속내에, 속이 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꽉 채워, 스스로 나만의 동선을 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일이거늘. 하루하루 누리는 그 자유들을 나는 얼마나 충분히 만끽하고 있나.


생각 없이 내뱉는 육아일상 속, 불평불만들이 누군가에겐 한없이 부러울, 선물 같은 하루라는 걸 모르고. 꼭 말이 없는 묵묵히 꿋꿋한 사람의 입에서, 꼬불쳐둔 마음 한 자락을 꺼내게 만들어 듣고 나서야! 확인하고 나서야! 네가 힘들었구나... 그래, 그랬겠구나... 뒤늦게 공감하고 헤아리는 모양새라니. 잔인다.


함부로 힘들다는 말을 내뱉지 않고, 나의 고충으로, 누군가에게 감정의 쓰레기통 삼아_물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까짓 일들로 도망가고 싶다, 내빼지 않으려 한다. 성에 안 차더라도, 구멍 난 가족들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는 여력에 감사하려 한다.

매 순간 긍정을 말할 수는 없을 테지만, 밖에서 부러움 거리를 만들지 않고 내 안에서 만족을 찾고 긍정을 말하려 한다. 그래도, 이만하길 얼마나 다행이냐고, 다독거리려 한다.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 모두가 일상 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꽉 채운 동선을 짤 수 있게 되길 하루하루 기도한다.


나만 누리는 듯한 자유와 좋아하는 시간들로 채우는 안온함에,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길 기도한다.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곧 성향과 취향에 맞는 최적의 동선으로 꽉 채우는 평범한 하루를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이전 02화 요양병원 대신 에이드와 장어구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