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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Nov 05. 2024

유품 정리, 가을맞이 정리, 마음 정리

쓸쓸하게 붉거나 노란, 형형색색 마른 잎들이 날아다닌다. 낙엽 무더기 사이를 뛸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양갈래로 날아오르는 낙엽들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선선한 바람결을 따라 뛰는 날이 늘었다.


(49재 전까지, 조심하며 차분하게 지내자)

서로 당부하며 저마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유품 정리를 하고 가을맞이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정리라지만 '끝맺음'과 '시작'이라는 현저하게 결이 다른 정리 앞에 또다시 길을 잃었다.


잊으려 해도 내 속에 희뿌연 공기와도 같은 덩어리가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덩어리는 점점 더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그 덩어리를 말로 바꾸어 낼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말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이제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자취들을 더듬는 일. 어쩌다 마주치는 노트 한 켠 비밀스러운 기록들을 모른 척하는 일. 옛 추억들이 묻어난 사진을 들여다보며 마냥 아쉬워하는 일. '아까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그 일들 앞에 나는 '회피'를 선택했다. 속전속결로 비닐에 담고 더 이상 들춰보지 않을 듯이.


하지만 나보다 더 먼저 정리에 들어갔던 엄마는 '선택과 집중'을 택한 듯했다. 굳이 몰라도 될 비밀스러운 것들을 캐내고 애써 모른 척하던 옛날의 상처들을 다시금 헤집는 듯했다.


결혼 생활 내내 켜켜이 쌓인 불신과 의심들을 다시금 확인하는 작업이, 지금 이 순간 과연 무슨 의미일까.


말리기엔 이미 말들이 한 발 늦었다. 습관처럼 발동한 명탐정 기질에, 발 빠른 손과 번뜩이는 눈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그 속의 모든 재앙들을 확인한 뒤였으니까. 그 상자를 닫기 전, 한 자락의 희망도 남기지 못한 엄마는 결국 장례식장에 오지 않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닫았을 테다.



이미 끝나버린 관계, 대답 없는 사람에게 엄마는 무엇을 찾고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사과와 뉘우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고생했다는 치하의 말. 아내로, 엄마로, 그동안 고마웠다는 마지막 인사.


부질없었다. 난 늘 아빠에게 더 관대하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굳이 과거를 캐내 일을 삼지 않아도 될 만큼 현재의 것들도 충분히 버거웠으므로. 알은척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관대함과는 상관없이.


이불을 빨아 널었다. 남은 우리들의 계절은 새롭게 시작되어 차가워진 바람 끝을 준비하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으로. 두툼한 가을, 겨울 옷을 꺼내고, 이불갈이를 하고. 내친김에 매트리스 청소부터 침대, 소파, 장식장 밑 청소까지 집안 곳곳을 들어 엎었다. 지금 여기에서 이 먼지 빵떡이 나올 일인가 싶을 정도의 먼지들을 날려 보내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버리지 않고 놔두면 언젠가 쓸 날이 오겠지' 오랫동안 쓰지 않은 채 자리만 차지했던 물건들과 안녕.

버리지 않고 놔두면 그동안의 추억마저 집어삼켜버릴 백해무익한 감정들과도 안녕.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어 봤자 내 마음 한 구석, 천천히 갉아먹어버릴 미움과 분노들과도 안녕.


어쩌다 발견한, 누군가의 비밀 한 조각들은 다시 '삭제'라는 빨간딱지를 붙여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고.

잔상을 남겨 나도 모르게, 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와 또 다른 재앙을 남길 지 모를 그 위험천만한 것들에도 '위험 ×폐기물'이라는 스티커를 붙여 폐기했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 노르웨이의 숲



대신 다이소에서 새로운 수납정리함들을 들여 깔맞춤으로 정리를 하면서 라벨 작업을 했다.

한눈에 들어오게, 종류별로 정리한 물품들에 마음까지 산뜻해지는 순간.


정리 앞에 착각이 들었다. 새로운 계절 앞에, 가다듬은 마음 앞에, 꿋꿋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이제는

'엄마와 아빠처럼 안 살 거야.' 하나 더 붙은 전제 앞에 이기적으로 악착같이 살아낼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먼지와 함께, 유년기의 케케묵은 감정들마저 꽁꽁 싸 메어 띄워 보낸 것만 같은 착각. 괜찮지 않은 감정들도, 못 본 척 회피를 거듭하다 보면 먼지처럼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착각.


정리를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우리는 살아 있고,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뮤즈의 영혼이여. 평안히 잠드소서.
나는 아직 좀 더 애써볼 테니까.

- 무라카미하루키



오이와 토마토를 담고 보랏빛 양파 대신 무화과를 성큰성큰 썰어 올렸다. 레몬즙과 올리브오일을 휘 두르고 소금과 후추를 솔솔.


야들야들한 연두부 위에, 견과류를 얹어 식감을 주고 찐 계란과 함께 내었다. 깨를 갈아 넣어 향이 고소한 드레싱을 곁들어 한 술 크게 떠 넣어 먹었다.


적당히 오염됐다면 난 외면했을 것이다.
모른 척할 정도로만 썩었자면
내 가진 결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 삐걱 소리가 난다.
더 이상은 오래 묵은 책처럼 먼지만 먹고 있을 수 없다.

- 비밀의 숲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잿빛처럼 바래지는 날이 오면 내가 쓰는 글씨 한 자 한 자가 칼춤을 출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몸에서 삐걱 소리가 나도록 그냥 두진 않을 것이다. 오래 묵은 책처럼 먼지만 먹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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