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난다.
어떤 이름은 영원히 죽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타오르는 얼음이다. 폼페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 절대 변하지 않는 이름, 살아있음의 증거인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이름. 이 이름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멸망, 폐허, 죽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떠올린다. 말이 줄고 심장이 더듬거린다.
만약 지금 내 앞에 '체르노빌레츠'가 서 있다면..... 그가 수줍게 모자를 벗고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민다면......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아니, 나 역시 당황하고 두려운 얼굴로 그를 거절할 것이다. '미안해요...' 라는 말도 차마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 창 밖엔 눈이 내린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어둡다. 막 이 책을 덮어서일까, 저 눈은 영혼이 다 타버린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재처럼 느껴진다.
아무런 보호장비도 갖추지 못한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차출된 사람들은 끔찍하게 죽어갔다. 그들이 받은 것은 돈, 보드카, 훈장, 가족의 피폭, 불구가 되거나 죽어서 세상에 나온 아이, 녹아내리는 몸을 거울로 보고 길게 비명을 지르는 밤.
평생을 흙을 파 씨를 심고 술을 빚어 이웃끼리 나눠마시던 사람들은 집을 잊지 못해 소개당한 마을로 몰래 돌아와 산다. 밖에 나가면 체르노빌레츠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사람일 뿐이다. 미친 숲의 동물들과 방사능 투성이 과일을 따 먹으면서 텅 빈 집에 앉아 산다.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여기엔 삶이 있으니까.
아이들은 곧 죽을 것이라는 걸 안다. 조숙한 아이는 교실에서 벨트로 목을 메고 여자아이들은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아기가 못생겼을지라도 사랑하리라고 힘주어 다짐한다. 죽음을 아는 아이들은 더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체르노빌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자연은 느리지만 회복하고 있고, 사람은 그곳을 회복시키며 살아야 한다. 두려움, 공포, 절망, 분노, 괴로움, 혹은 모종의 정치적 이유로 피폭당한 땅과 나무, 동물들에게 더이상 몹쓸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해야할 일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명한 과학의 목소리도 있다.
이 모든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작은 사발을 뒤집에 귀에 댄 것처럼. 교회의 고요가 첨탑으로 기어오르면 햇빛이 머리를 깨고 황금빛 피가 흘러내리듯 어떤 기도가 들린다. 사랑한다는 기도와..... 사랑을 잊지 못하는 기도가.
이 이야기는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끝내 놓지 못해 죽음을 지켜보았고 엄마가 피폭당한 방사능을 고스란히 가져간 채 죽어버린 자궁 안의 딸까지 놓쳐버린 사랑, 무덤이 되어버린 침대에서 곤죽이 되어 흘러내리는 남편을 마지막까지 사랑한 여자. 그녀들의 '사랑해요'가 귓가에 맴돈다.
이것을 재앙이라고도, 사고라고도, 전쟁이라고도, 천벌이라고도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높고 낮고 흐느끼고 분노하는 목소리가 음계를 오르내리며 울려퍼진다. 이것이야말로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이야기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낮은 식탁에 마주 앉아 오래 귀를 기울어야만 들을 수 있는, '거기 있었고 거기 있고 거기 있을' 진짜 이야기. 너무 거대해서 실감이 안나는 숫자나, 내 생활에 스미지 않아 멍하니 끄덕이게 되는 정책이나, 폭로, 사과, 처벌,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인가. 다시는 끌어안지 못할, 재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이의 몸을 떠올리며 아이들이 들을까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것이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 너무 작고 사소해서 공중을 떠돌다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일, 이 마음이야말로 작가의 영혼이다. 우리는 희미하고 흐릿한 슬픔 앞에 손을 내민다. 이름도 없는 투명한 입술이 더듬더듬 내뱉는 말을 -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