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볼 것이 많아서 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눈을 들면 하루하루 색이 달라지는 하늘, 번지고 흐드러지고 저물어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 시시각각 달라지는 지붕의 음영, 점점 가벼워지는 노을빛과 하나 둘 불이 켜지는 창문들이 있는 골목, 그 골목에 오래 서 있으면 지구 반대편까지라도 닿을 듯 길어지는 내 그림자.
봄에 소설을 읽었다. 김멜라, 나일선, 위수정 - 첫 소설집을 갓 출간했거나 곧 출간할 젊은 소설가들. 아득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면 말라붙어있는 입술처럼 거칠기도 해서 문장의 끝을 잡고 마음을 달래며 읽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책을 읽다가 세탁기를 돌리고 책을 읽다가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다가 방을 닦기도 했다. 게으르게, 툭툭 끊어서 읽어도 좋을, 그런 슬픈 문장들.
팔을 크게 휘두르며 큰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체가 지나간다. 체가 사랑하는 앙헬과 체를 사랑하는 앙헬의 서로 다른 표정을 본다. 가슴 가운데 손을 얹으면 좌우로 나비의 날개처럼 펼쳐진 심장과 폐가 있다. 피가 돌고 숨이 드나드는, 내가 만질 수 없는 서로 다른 표정.
JS의 오른팔에 새겨진 열 마리 새들 중 한 마리는 손등으로 날아왔다. 곧 한 마리 또 한 마리 어딘가로 떠날 것이다. 새들의 거처는 구름이라고, 아름다웠던 어느 배우는 말했지만 - 그래서 그는 허공에 몸을 날렸지만 새가 되지 못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새들의 거처는 구름이 아니라 둥지다. 거기엔 먹다 남은 벌레와 부화가 될지 모를 알들과 밤새 몸에서 빠진 깃털이 나뒹군다. 시는 둥지의 언어일까, 구름의 언어일까. 아마 둥지 가장자리에 턱을 괴고 구름을 바라보는 일이겠지.
하나는 더빙한 작품을 TV로 보며 지환에게 속삭인다. 내 목소리가 낯설어, 얼굴이 달라서 그런가. 시시각각 죽음에 대한 망상에 시달리는 지환은 이 긴 펜데믹이 하나와 자신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모른다. 그들은 평일 오후 4시, 7층 높이의 24인승 엘리베이터 안에서 약 15분간 갇혀 있었고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전염병 떄문에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포기해야 했다. 언젠가 끝나겠지, 라고 말하는 그들의 일상이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둘은 함께 살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동생 명은이 오빠 경은처럼 베란다에서 몸을 날릴까봐 두렵다. 지환은 운전을 하며 트럭과 충돌하고 베란다에서 떨어지고 낯선 남자가 칼로 찌르는 환상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게 병 때문이야. 하나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환이 반한 목소리, 하지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 내 목소리가 낯설어.
여전히 사랑을 믿고,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몸을 밀어내고, 미지근한 절망에 잠겨있어도 생명을 움켜쥐고 있는. 결이 다르지만 어딘지 닮아있는 문장들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뭇잎이 마르고'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 '은의 세계' 나뭇잎이 마르면 은빛이 된다. 그 사이로 구름이 흘러간다. 순연하고 온순한 아름다움을 밀어내며 새는 난다. 새에게는 발이 있다. 돌아가서 돌봐야 할 둥지가 있다. 땅에 있는 인간 하나가 고개를 들어 날아가는 새를 보고 감탄한다. 자유롭고 아름다워 - 그러나 새는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그의 몸으로 불어오는 역풍을 거스르며 새는 한사코 구름에게 날아간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아름답기 위해서 - 서로 멀어지는 손을 꼭 붙잡기 위해서 - 긴 꿈을 꾸는 것만 같은 이 시간 속에서 그만 맥을 놓지 않기 위해서. 실존을 위해서.
예술은 여전히 인간을 향한다. 우리는 여전히 실존을 말한다. 손발이 녹아버리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다정한 감정이 다가와 얼굴을 지우는 시를-. 그러나 감정 속에서 익사한다고 해도, 사라지는 손발과 얼굴을 쓴다고 해도 우리는 여기 있다. 여기 있기 떄문에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리 사라져도 여전히 발화하는 것이다. 흩어지며 안부를 전하는 목소리가 있다. 낯설지만 - 분명한. 그러니 다시 창을 열자. 쌀쌀한 공기가 들어오고 시럽같은 햇빛이 옆집 지붕에 흐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산다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새가 우는 아침이 있다. 간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둥지에 돌아와 깃털을 고르는 새들이 지저귄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