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중, 바닥의 소리로 여기까지

by 별이언니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이름이다. 이름의 열림. 언젠가의 사건. 오고 있으나 과거인 이름. 때가 되면 이름을 옮기는 자들은 그런 환상을 본다. 그는 이름을 옮겨 적고 있다. 흐려지는 시력에 의지한 채, 종종 옮겨야 할 이름을 누락하면서 종종 한 시대와 다른 시대의 이름을 한 행에 모아 두면서 이 모든 우연이 이름의 우연일 때를 위하여. 이름의 시간을 지탱하면서 흩어내는 순결함으로. 두려움 없이 기록을 하고 누락과 복원의 기록을 이어 가다가 스스로를 잊는다. 그는 놀랍게도 모든 이름의 실수를 기록한다. 이 기쁜 소식인 이름의 텍스트가 그의 손 앞에 도착한다. 기쁘게 이름을 낳고 이름을 옮기고 이름을 구속하고 이름을 해방하며 이름의 시간이 이름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이루어낼 때, 그때를 기다리는 자들은 무너진 자리에서 이름이 누구를 쓰고 있는지 비로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흩어진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리다.


<필사자> 중




신성은 다만 사랑에 머문다고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사랑을 건넬 때 우리는 이름을 부른다. 명명된 이름을, 명명되지 않은 이름을. 모르는 이름을, 잃어버린 이름을. 흐릿하게 지워져 이내 흩어져 버릴 것들의 발목을 부여잡고 시인은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공기에 부딪쳐, 바람에 휩쓸려, 햇빛에 숨고, 구름에 뒤엉키다가, 흙에 녹아 뿌리를 내린다. ​


시인의 세계엔 익명은 있어도 무명은 없다. 시인은 기어이 어루만져 제멋대로의 이름을 적으니까. 시는 시인이 세상을 명명하는 일. 세상에 사랑을 건네는 일. 비로소 신성이 깃드는 일. ​


계절은 반 뼘 어두워지고 가구 그림자가 뼈로 스민다. 이런 날은 근심이 사라진다. 오늘은 열 개의 이름이 사라졌고 스무 개의 새로운 이름이 탄생했다. 그 사이 주석, 그 사이 작은 글씨의 낙서, 신성은 다만 사랑에 머물러 조그만 입술을 사랑스럽게 오므리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이름의 자취.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