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모기 May 14. 2024

사랑, 같은 언어로 말할 때의 아늑함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인간이 언어 없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눈빛으로 주고받는 사랑, 이 말은 시의 문장으로는 아름답지만 현실과는 멀다. 사랑은 순간이 아니다. 길게 이어지는 삶 속에서 시선만으로 사랑을 나누기는 어렵다. 언어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없이 삶을 공유하고 감정을 나누기에 인생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사랑은 어떨까. 이 역시 쉽지 않다. 같은 언어 사용자이거나 혹은 두 명이 한 언어로 거의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을 때, 사랑도 충분히 편안하다.

어설픈 영어를 구사하는 내가 외국인을 만나 대화할 때 느꼈던 그 막막함이 지금도 선명하다. 세부적인 감정을 묘사할 수 없어서, 아주 쉬운 단어로 포괄적인 대화밖에 할 수 없어서, 내가 뱉는 말들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답답했다. 모국어로 내 마음을 묘사하는 것의 편안함을 절절히 체감했던 그런 경험이 있다.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후 수어를 더 많이 접하고 싶었다. 드라마를 찾아보니 2023년 말부터 2024년 초까지 방송된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는 작품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수어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혹시나 내가 배운 수어 단어가 나오려나 싶어 시선을 고정한 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느린 걸음걸이처럼 잔잔한 드라마의 분위기에 빠져버렸다. 따뜻하고 슬프고 아름답고 아팠다.


사고로 농인이 된 남자 주인공의 직업은 화가이다. 배우가 되기를 꿈꾸는 청인 여주인공과 만나 스며들듯 서서히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열심히 수어를 배운다. 서툰 수어와 휴대폰을 이용한 대화(여자가 말을 하면 휴대폰에 문자로 입력된다. 남자는 입력된 글을 읽는다.), 문자 메시지, 종이 위에 펜으로 쓰는 글씨로 둘은 대화를 한다.


사랑이 시작될 때는 소통도 쉽다. 서로 좋기만 할 때는 사실 말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눈빛만 봐도 사랑이 꽃피는 그 좋은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드라마 속에서도 그랬다. 청인과 농인의 사랑이 초반에는 수월했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알지. 말 따위 필요 없이 바라만 봐도, 곁에 있기만 해도 좋은 그런 때가 있다.

하지만 인생사는 복잡하다. 서로 오해와 갈등이 생기고, 해명해야 할 일이나 긴 설명이 필요한 일들이 많아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대화를 나누어야 비로소 해소되는 문제들도 많다. 서툰 수어나 필담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마음들. 두 사람 사이에도 그런 상황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소통의 어려움에서 기인한 갑갑함이 보는 나를 안타깝게 했다.  

    

 남자주인공 차진우의 독백 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단어 중 가장 쉽고 간단한 것을 고르고 골라 서로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 마음이 지금 주고받는 말들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로 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진우의 구부정한 뒷모습은 늘 쓸쓸했다.


사랑의 위기를 겪던 무렵, 한 침대에서 등진 채 누워있던 두 사람. 대화를 나눠볼까 싶어 휴대폰을 들고 대화 앱을 켜는 남자. 그 순간 여자가 긴 한숨을 섞어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아, 답답해.' 그 말이 그만 남자의 휴대폰 액정에 문자화되어 뜬다. 남자가 읽고 만다. 그녀의 본심을.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고 쌓여 그들은 결국 헤어지고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16부작까지의 드라마를 한 편 한 편 아주 따뜻한 마음으로 보았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사랑에 대해, 그 어려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둘은 서로를 몹시 그리워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나면서 드라마는 끝난다.

그 후로 여주인공이 수어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남자가 소리와 음성을 잃은 이상 그 둘의 언어는 수어일 수밖에 없으므로. 눈빛뿐만 아니라 수어로 둘이서 충분히 소통하며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임을, 오래오래 그 사랑을 이어갈 것임을 믿는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는 여러 배우들이 수어로 말한다. 수어를 하는 많은 배우들의 손가락이 아름다웠다. 나의 수어선생님만큼 농인분들만큼 수어 하는 배우들의 표정이 풍부하지 않은 것은 아쉬웠으나 그래도 배우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얼마나 열심히 수어를 익혀 연기했을지 수어를 손톱만큼 배워본 이로서 그 어려움을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제 농인인 배우가 드라마 안에 등장해 유창한 수어실력을 보여줄 날도 기대해 본다.

이런 드라마는 더 많아져야 한다.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되고 농인들의 세상을 알게 되는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늘 거기 존재하지만 그 존재 사실조차 잊고 살기 쉬울 때, 이런 드라마 한 편은 우리들의 문을 똑똑 두드려 준다.


여주인공 정모은 씨, 지금쯤은 아주 빠른 손놀림에 유창한 표정을 얹어 차진우 화가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중이시죠? 저도 그대들이 손으로 나누던 이야기 중 몇 개의 단어를 알아 들었어요. '사랑한다고 말해줘'도 수어로 말할 수 있답니다. 저도 열심히 수어라는 언어를 배워볼게요. 눈빛이 아닌 수어로 사랑한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수어로 편안하게 내 안의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볼게요. 우리,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 아늑함을 누려보아요.

이전 06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세상으로 내보내는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