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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y 14. 2024

(독서가 취미) 8.벽돌책 도전하기

내가 읽은 벽돌책은 레미제라블(민음사 5권짜리를 한 권 1800쪽으로 펴낸 책이다), 한국전쟁, 6.25 전쟁과 미국, 예루살렘 전기, 기독교의 역사, 젠틀 매드니스, 모디빅, 슬픈 열대, 불평등의 창조, 세네카의 인생론,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하루키의 <1Q84> 등이다.

취미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목표나 계획 같은 것들을 세우지 않고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하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취미가 온전히 자신 안으로 들어오면 취미는 이제 시간 나면 슬슬 해 볼까 하며 손으로 엉덩이 털며 일어서 취미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다. 취미는 진심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그 무엇이 된다. 꼭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꼭 철학적인 사랑,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더라도, 취미는 충분히 내 안에 사랑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사랑하면 욕망하게 되고 욕망하면 소유하게 된다. 물론 비뚤어진 욕망은 비뚤어진 집착을 낳게 하지만, 건강한 욕망은 왜곡된 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키는 디딤돌이나 마중물 역할을 하게 된다. 책을 읽어야겠다는 욕망은 책 속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책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도 표현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책을 읽을 때 절대로 책 표지를 왼쪽 눈금이 생기도록 딱 접지 않는다. 그리고 책장도 부드럽게 넘긴다.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새책처럼 그렇게 보이도록 한다. 책덮개(북커버)를 사거나 만들어서 책 표지를 보호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교과서를 받으면 지난 해 커다란 달력을 찢어서 교과서를 씌우는 덮개를 만들어서 입혔다. 날마다 들고 다니며 공부하다 보면 찢어지거나 김치 국물이 흐르거나 닳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 책을 깨끗하게 사용해서 동생이나 후배에게 물려줄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의 어린시절은 가난했고 책은 경제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나는 대학생 시절에도 책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지 않고 몇 시간을 걸어 이동하며 차비를 아껴서 책을 사는 데 보탰다. 서점이 흔하지 않았던 그때, 길을 걷다 서점을 발견하면 무조건 서점 안으로 들어가서 책 냄새를 맡고 손가락으로 책을 훑으며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책에 대한 동경으로 슬프게 내 마음속 책장을 넘겼다.



이런 가난의 흔적은 어른이 된 지금, 청년 시절에 비하면 책 사는 데 돈을 투자하는 것에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살 때 값은 싸면서 책은 두꺼운,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가성비가 높은 책을 선호하는 나쁜 습관이 생겼다. 책이 두꺼워야 했다. 별로 두껍지도 않은데 굳이 두 권으로 나눠서 판매하는 출판사를 싫어했다. 이거 한 권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왜 두 권으로 나눈 거야, 하면서 짜증이 났다. 특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예전 같으면 한 권으로 냈을 책을 판형을 작게 하고 두께도 줄이면서 두 권으로 나눠서 판매하면, 나는 그 책을 사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경제적인 거부감이 들어서였다. 물론 너무 읽고 싶은 책일 때는 내 마음을 억누르고 책을 사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한 권으로 된 두꺼운 책을 선호한다.



이러한 나의 독서 습관은 동서출판사를 만나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지금까지 두 권, 세 권, 심지어 다섯 권까지도 분책으로 나눠서 판매되는 책이 여기서는 커다란 판형에 글자도 빽빽하게 넣어 한 권으로 딱 만들어 버리고는 값도 한 권 값 수준에서 판매하는 것이 아닌가. 번역자가 누구인지 보다 한 권 값으로 두 권의 책, 세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벽돌책의 세계로 들어갔다. 500쪽, 700쪽 짜리 책을 넘어 1000쪽을 넘기는 책을 용감하게 읽기 시작했다. 인문학 쪽으로는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펴내는 책들이 대부분 그런 굵직한 두께의 책들을 펴냈다. 몰론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는 느리고 더뎠다. 하지만 나는 인내하며 벽돌을 격파하는 마음으로 벽돌책을 독파해나갔다.



결코 읽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책들도 두 번 세 번 도전하니까 끝내는 완독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을 수 있었다. 그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한 권의 책이 200쪽에서 300쪽 내외로 구성되기 때문에 사실 400쪽이나 500쪽 정도 되면 벽돌책에 넣어줘도 무방하다. 하루키의 1Q84 같은 세 권짜리 책도 한 권의 쪽수가 700쪽을 넘어가기에 한 권이 이미 다른 책의 두 권 분량 이상의 벽돌책에 속한다. 그래서 세 권을 다 읽었다면 거의 2000쪽 가까운 분량의 책을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



벽돌책의 개념, 그러니까 얼마나 두꺼운, 얼마나 많은 쪽수를 가진 책이어야 벽돌책인가 하는 문제는 다분히 주관적이다. 우리 독서인들이 벽돌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 용어(벽돌책)이 표준어도 아니고, 일상어도 아니다. 보통 너무 두꺼워서 근접하기가 힘들고 책을 펼쳐도 읽기가 힘들고 그래서 가끔 라면 양은냄비 받침대로 쓰이거나 베개 대신 사용되는 그런 책을 일컫기도 한다.



그래서 벽돌책은 독서라는 취미를,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가처럼 끝내 꼭대기에 오르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행위로 만든다. 클라이밍을 취미로 시작한 사람이 오르다 떨어지고 또 오르고 또 떨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전하는 것처럼, 독서도 완독을 위해 읽어내고 또 읽어내며 도전하는 취미가 가능한 행위로 만들어준다. 그런 면에서 큰 수익이 나지 않을 것같은 벽돌책을 꾸준히 만들어 내는 출판사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그들은 독서라는 취미를 심심풀이 오징어나 땅콩 수준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오르고 또 오르는 구도의 행위로 만들어 준 일등공신 출판사인 것이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소에 들어가서 한 달간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퇴소하는 마지막 날 부모님들과 친구들과 사령관들이 보는 앞에서 민간인의 때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증명하기 위한 마지막 동작으로 가마에서 구운  벽돌 하나를 앞에 두고 온몸을 던져 그것을 깨부수어야만 한다. 그래야 이등병 작대기 하나를 가슴과 모자에 다는 진짜 군인이 되는 것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두께로 치자면 훈련소에서 깨부수는 벽돌보다 우리가 읽어내는 벽돌책이 더 두껍다. 속이 찬 것으로 치자면 훈련소의 울퉁불퉁 엉성한 벽돌보다 더 알이 꽉 차있다. 읽기가 난해하고 진짜 무게를 재어봐도 벽돌책 무게가 더 많이 나갈 것이다. 그런 벽돌책을 앞에 두고 몇 달에 걸쳐 온몸으로 그것을 완독해내는 훈련과 같은 과정을 거침으로써 우리는 '초급 취미 독서가'에서  '두꺼운 책 좀 읽어본 고수 독서가'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수 독서가라도 늘상 벽돌책을 읽어낼 수는 없다. 적당한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일 년에 벽돌책 한 권 정도를 목표로 삼아 3개월, 6개월 그것도 힘들면 1년 정도 기간을 두고 조금씩 읽어나가는 방법을 추천한다. 벽돌책 읽기는 계획 독서를 해야만 성공 가능성이 높다. 총 쪽수를 월별로 적당히 나누거나, 챕터별로 나누어서 계획표를 만들고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읽어나가는 것이 완독 성공률을 높인다. 가령 토요일, 일요일은 벽돌책 읽는 날로 정하고 그 날은 다른 책은 읽지 않고 벽돌책만 읽는 것이다. 1년이 52주니까 토일 읽으면 104일을 읽는 셈이다. 그러면 전체 총 쪽수를 가지고 나누어서 읽을 분량을 정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벽돌책은 레미제라블(민음사 5권짜리를 한 권 1800쪽으로 펴낸 책이다), 한국전쟁, 6.25 전쟁과 미국, 예루살렘 전기, 기독교의 역사, 젠틀 매드니스, 모디빅, 슬픈 열대, 불평등의 창조, 세네카의 인생론,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하루키의 <1Q84> 등이다.




벽돌책을 다 읽고 나면 자신의 독서 내공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끈기, 인내. 노력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책읽기이기 때문이다. 



독서를 취미로 한다면, 이제 벽돌책에 도전해보자.


그동안 200~300쪽 정도의 책만 읽어왔다면, 500쪽 정도의 책을 도전해보고, 700쪽, 900쪽 그렇게 해서 1000쪽을 넘기는 벽돌책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독서가 취미라면 도전의식이 있어야 한다. 일년 동안 몇 권의 책을 읽어보겠다 하는 목표도 세우고, 그걸 즐겁게 삶 속에서 취미활동의 하나로 쉬지 않고 이어갈 때 독서는 내 삶의 일부가 된다. 어쩌다 생각나면 '책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는 절대 독서를 취미로 삼을 수 없다. 취미는 빠져드는 것이다. 벽돌책. 묘하게 도전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독서를 취미로 한 것이 참 즐겁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녀석이다.




아직 내 책장에는 완독하지 못한, 아니 손도 대지 못한 벽돌책이 가득하다. 가성비를 생각한 나의 책 구입은 특히 동서문화사 출판사의 저렴한 벽돌책 구성으로 많이 이루어졌다. 정말 벽돌처럼 가득 책장에 꽃혀서 어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한 권씩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 올해는 철학으로 넘어가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실천이상비판>을 도전해볼까 생각 중이다. 나는 상대와 겨루어 이겨야 하는 게임에는 약하다. 너를 이기고 내가 승리하는 기분을 만끽하는 것은 어쩌면 꼭 죄를 짓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런 게임은 좋다. 내가 나와 하는 게임이고 도전이기 때문이다. 벽돌책 도전. 독서를 취미로 생각한다면 한 번 정도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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