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 일곱 살 어린 소녀의 눈에 투영된 어른 세계의 부조리와 이별의 슬픔
첫 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일곱 살 때 이미 '작은 회사원' 같았다는 주인공 여름이의 생각이, 슬픔이, 아픔이 내게 너무 시리도록 아프게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일곱 살 때 나는 '작은 회사원' 같았다.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했다. 맡은 임무가 있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조용히 앉아 책 읽기, 글씨 베껴 쓰기, 텔레비전 보기, 심부름 하기, 말하지 않기, 뛰지 않기, 울지 않기, 쓸데없이 밖에 나가지 않기, 손님이 오면 인사하기, 손님 앞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동시 암송하기, 한숨 쉬지 않기, 인사하기 인사하기 인사하기, 겸양 떨기. (11쪽. 첫 문단)
일곱 살 때 이미 엄마가 없어 고모 집에서 자라야 했던 가냘픈 아이.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른의 세상은 모든 게 부조리하다. 아이가 배운 건 피로한 것들이었다. 착한 아이로 비쳐지기. 그것이 아이에게 부과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다.
시인 박연준이 처음 쓴 소설. 그래서 문장은 시처럼 아름답고 간결하다. 기자 출신 작가 김훈처럼 간결한 문장이 특징이다. 김훈의 문장이 안으로 파헤치며 들어가 슬픔을 토해내는 문장이라면, 시인 출신 작가 박연준은 여리게 감싸안고 들어가며 아픔을 도려내는 문장이다.
새엄마는 걸레질을 하며, 창문을 닦으며, 신발을 정리하며 말을 한다. 나와 둘이 있을 때만 하는 비밀 얘기다. 그녀의 비밀은 '아무튼 네가 싫다'는 거다. 나는 별 생각이 없다. 생각이 없지만 어느 날은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똑같은 소리를 듣는 게 고단해서다. 눈물을 흘리는 건 "절대 안 돼"라고 배웠기에 당황한다.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땐 눕는다. 누우면 눈물이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눈물은 기어코 흘러나와 귓속으로 들어간다. 눈과 귀는 이어져 있다. 눈이 내미는 것을 귀가 받고, 귀가 받아들이는 것을 눈이 밀어낸다.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는 더 이상 비밀 얘기를 하지 않는다. 내 귀도 놓여난다. (37)
어린 시절 나는 나를 숨겼다. 거짓뉴스처럼 나를 포장해서 착한 아들로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엄마는 지금까지 나를 착한 아들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때문에 심히 피로했고 힘들었고 죽고 싶었다. 지금은 노쇠하여 젊은 시절의 완벽주의가 거의 사라졌지만, 어머니의 수준 높은 완벽함의 추구는 어린 시절 아이들이 달성하기 힘든 목표였다. 나는 종종 내가 없어져 버리거나 죽어 버리면 부모님이 얼마나 상심할까를 상상하며 실천에 옮기려 노력하기도 했다. 여름이가 친구가 된 루비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친구 집에 놀러갈 때마다 그 친구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표면적으로, 엄마의 체면을 구기지 않는 착한 어린이였다. 공부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나는 어린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잘 알았고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나를 숨기며 살았다. 여름이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그러나 여름이는 적당한 단어, 말을 몰랐기 때문에 숨는 방법을 택했다. 그 장면을 읽는데 가슴이 찡해져 왔다. 말이 가난할 때 할 수 있는 것으로 울기, 웃기, 넘기기, 돌아가기, 죽기, 숨기.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그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짜로 웃는 것이고, 모른 척 넘기는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건 '죽기'다. 다행히 여름이는 죽기 대신 숨기를 택했지만, 나는 내내 죽기를 생각했다. 그래서 여름이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 어린아이도 죽음을 꿈꿀 수 있다는 걸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믿음을 저버린 사람을 '배신자'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세상에 그런 편리한 단어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사용했을 게다. 할머니의 등에 대고, 세 글자로 이루어진 화살을 쏘았을 게다. 할머니가 후회와 반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추를 매달고 살기를 바랐을 게다. 그러나 나는 말을 몰랐다. 마음은 있으나 말이 가난할 때 할 수 있는 건 울기, 웃기, 넘기기, 돌아가기, 죽기, 숨기 등등. 내 경우엔 숨었다. (84)
나는 '상심'이란 말이 걸렸다. 할머니와 나 사이, 또다시 강이 생겼는데 하필 그 강이 내 목 안에 생겨났다. 눈물을 참지 않으면 얼굴에서 눈이 연약해지는데, 눈물을 참으면 얼굴 아래 목이 취약해진다. 목은 둑처럼 외로이 서서, 몸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것들을 홀로 버텨야 한다. 슬픔, 고통, 회환, 괴로움, 억울함, 쓸쓸함 따위 타르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홀로 붙잡고 있어야 한다. 목울대가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울고 싶지 않았다. 돌아온 배신자 앞에서 내 연약함을 보이는 건 모양이 빠지는 일이었다. 눈을 치뜨고 천장을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상심으로 죽을 수 있는 건 개와 어린애뿐이야." (101)
결국 여름이는 유일한 친구 루비와 헤어진다. 도망갔던 루비의 엄마가 루비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여름이는 루비와 화해하기 위해 이런저런 꾀를 냈는데 루비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다. 서로 의지할 사람이 둘밖에 없는데도 둘은 하나가 되지 못한다. 결국 너는 너고 나는 나가 된다. 어린이라도 상처는 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별은 깔끔하다. 사과 반쪽처럼. 나뉘고 먹히고 사라진다. (197)
시인 박연준이 쓴 아름답고 처연하고 슬픈 동화 같은 소설, <여름과 루비> 아직 당신이 어린 시절 '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내면아이'를 무의식 한쪽 구석에 밀쳐두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치유받길 원한다. 나는 사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다 풀었다. 어머니는 모르겠지만 나 혼자 봉인해제하고 풀었다. 나도 철이 들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어머니는 너무 노쇠하여 젊은 시절에 대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픔을 이렇게 미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독자에게 내면아이와 마주하게 하고, 스스로 그 틀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준 시인이자 소설가인 박연준 작가에게 감사를 표한다.
한 마디로 여리고 아름다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