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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기분

폴오스터, 4321

by 봄부신 날

[비참한 기분]



(폴오스터, 4321-1, 121쪽)



종종 한국에 대한 글을 해외 소설에서 접할 때가 있다.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든다. 마치 이국 낯선 땅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마치 서울에서 부산 동네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렇지만 이렇게 한 가정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이유가 그들에겐 지구 끝자락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 때문이라면, 이 글의 주인공 퍼거슨이 느껴야 한다고 느끼는 그 비참함이 내게 먼저 다가온다.


10분마다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망할 그 전쟁이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라니, 근데 총을 쏜 사람은 중국인이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미국인이라니. 아니, 이국에서 잘 살아보려고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의 자식이라니.


비참함을 넘어 수치스럽고 굴욕적이다. 내가 일으킨 전쟁도 아니지만 이 글을 쓴 폴 오스터에게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다.


소설에서 슬픔의 원인을 다른 사건으로 바꿔주면 안 되겠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으며, 퍼거슨이 느끼려고 했던 그 비참한 기분을, 동시에 수백 수천 가닥으로 내몸을 때리며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선명하게 감각한다.

신이 버린 산악지대 한국에서 죽어간 아들 때문에 부모인 루와 밀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헤어나오고 싶지 않은 술에 빠져버린다.


길고 긴 수천 년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고작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죽은 아군 군인 20여만 명과 민간인 100여만 명의 삶을 이어붙여 역사로 만든다면 수천 년의 역사는 있는 힘껏 꼬리를 감출 것이다.


전사자뿐만 아니라 그 부모, 형제, 친척들까지 모두 합치면 인생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인생의 역사가 얼마나 장구한지 우리는 미처 헤아릴 수 없다.


옆에서 보면 한 순간이지만,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결코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 띠가 된다.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기분을.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어 군인이 된 우리의 아이들. 루와 밀리의 아들도 고작 19세였다. 권력자의 헛된 망상에 희생되면서도 그것을 애국심이라 포장하는 비합리화된 세계에서 전쟁은 일어난다. 그것은 비참함이지 자긍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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