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기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 94쪽에서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에 기댔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무엇인가가 그녀에게서 내게로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신경 하나하나, 머리카락 하나하나, 심장의 고통스럽도록 달콤한 박동 하나하나가 그것을 알려 준다. 그리고 그것에 복종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열인가.
(에브기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 94쪽에서)
주인공 D-503 남성은 I-330 여성과 하나가 되었다. 책은 1920년대에 쓰여졌지만 어느 미래의 시대를 가정하고 쓴 SF 소설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영혼을 소유하지 않았던 미래 단일제국의 번호 인간들은 모든 것이 규칙적이고 정해진 규율에 따라 완벽하게 움직이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주인공의 머리에 영혼이 들어오면서 고대 세계(지금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환각처럼 나타나고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중증 정신병에 감염된다.
지금 인용한 부분이 바로 그 단계이다. D-503 남성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물론 그 사랑조차도 실제 일어난 일인지 환각증세에 의한 것인지 현재까지 읽은 수준에서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이야기의 전개보다도, 오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흔든 부분은 마지막에 나온 “그것에 복종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열인가”하는 부분이다. 역설적인 이 문구는 “사랑”에 대한 완벽한 정의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쁨과 환희에 찬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100퍼센트 사랑을 사랑이 충만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중심으로 똘똘 뭉친 한 인간으로서, 복종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사랑을 온전히 체험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것은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복종이란 희생, 헌신과는 또 다른 관점이고 개념이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복종의 개념이 사랑과 동일어 또는 유사어로 받아들여지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 사랑과 복종은 그만큼 이질적인 관계이다. 물과 기름의 관계와 비슷하다.
사랑한다면서, 나는 복종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인간으로서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 또는 신이라면 우리는 복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경외감으로 찬탄하며 사랑으로 충만하여 복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우리와 동격인 사람이라면, 내 것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내가 그가 되어, 그에게 온전히 100퍼센트 동화되어, 책에서 표현한 “하나가 되어”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모든 정체성과 생활습관과 사고체계와 문화적 가치관을 버리고 그가 하자는 대로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을까? 시키는 것을 수행할 수 있을까?
성경 창세기를 보면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를 설명하는 구절에 “둘이 한몸을 이룰지라”라는 표현이 있다. 최초로 부부가 된 아담과 이브에게 신이 내려준 관계성 명령이다. 즉, 부부는 필연적으로 육체적인 몸이 하나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정서적, 심리적, 영적으로는 한몸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대로 실천한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지는 다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상대방은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나서, 하나님에게 자신이 잘못했노라고 말하지 않고, 이브는 뱀에게, 아담은 이브에게 잘못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에, 아담은 이브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날린 작자가 아니었던가.
처음에 조지 오웰을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의 마지막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가 그렇게 증오했던 보스를, 마지막에 결국 자신이 죽으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 버려도 될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총체적으로 그 모든 것이 이해되고 수긍되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필연적인 느낌도 들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복종의 희열”은 조지 오웰의 그 마지막 부분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판단의 결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다. 물론 이는 이론적이며 문구적인 결론이다. 실제 그런 상황이 내게 닥쳤을 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작 자신도, 며느리도 모른다. 그 상황에 닥쳤을 때 자신의 심리적 상태, 환경적 요인, 상대에 대한 애증의 정도 등 다양한 변수의 결합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그 상대성의 원리에 따라 절대적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중년과 노년 사이에 걸친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다시금 그런 “사랑”,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 복종의 사랑, 희열의 사랑을 맛보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진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주장하고픈 어떤 역설인 것이다.
그저 닳고 닳아서 정만 남은 미적지근한 사랑 말고, 그 대상이 배우자가 되었든지 하나님이 되었든지 간에, 복종하면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그 뜨거움의 충만!
소설 『모렐의 발명』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사랑하는 여인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실체적 존재가 사라지는 것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불멸의 사랑. 재가 되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비존재론적 사랑. 희열에 찬 복종의 사랑이란 바로 그런 사랑이다.
저자는 그 “복종의 희열”에서 비유 하나를 덧붙인다.
어쩌면 쇳조각 하나라도 자석에 달라붙을 때 그러한 희열에 차서 저 불가피하고 정확한 법칙에 복종할 것이다.
(에브기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 94쪽에서)
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몸서리치는 희열에 신열을 앓았다. 자석에 달라붙은 쇳조각의 희열이라니. 이렇게 멋진 비유가 있을까. 나도 남은 생 오직 당신과 그 쇳조각의 사랑에 철썩 합류하고 싶다.
아, 자석의 끌어당김에 열광하는 수많은 쇳조각들의 정확한 법칙이여. 그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