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한 발의 총성이 초원을 찢었다. 글래디는 총성이 울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게이드가 달려간 방향이었다.
"이런!"
총성으로 인해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사자들도 물러서기 시작했다. 와콤은 외쳤다.
"지금이야 모두 도망쳐!"
와콤의 외침을 듣자마자 글래디는 총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렸다. 인간이 또다시 게이드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뒤를 다른 코뿔소들이 쫓고 있었다. 와콤은 코뿔소들이 어느 정도 도망친 후에 사자들이 더 이상 쫓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가장 뒤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내내 뒤를 확인하며 사자들이 쫓아오지 않는지 확인했지만 총성 덕분인지 사자들은 더 이상 따라붙지 않았다.
글래디는 한참을 내달려 게이드가 쓰러져 있는 장소까지 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사자 한 마리와 게이드가 쓰러져 있었고, 그 사이에 레니가 있는 힘을 다해 겨우 서 있었다. 다행히 인간은 그 자리에 없었다. 레니는 다가온 글래디를 확인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사자와의 혈투에서 생긴 상처로 인해 이미 많은 피를 흘린 후였다. 글래디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게이드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게이드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레니가 잘 지켜준 덕분이었다. 게이드는 글래디에게 일러 받치기라도 하듯 그간의 일을 쏟아냈다.
"도망치는 중에 사자가 나타났고, 용감하게 싸우려 했지만 뿔이 없어 나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어요. 결국 레니 혼자 나까지 지키려다 많이 다쳤어요. 그러다 총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사자가 쓰러졌어요. 아빠, 레니 괜찮겠죠?"
"응! 당연히 그래야지! 레니는 좀 쉬면 괜찮을 거야."
글래디는 게이드에게 한 말과는 다르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사자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컸다. 레니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게이드를 지켜달라는 부탁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레니는 잘못될 수도 있었다. 자신이 너무 큰 짐을 레니에게 짊어지게 한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레니의 상태를 다시 살피니 상태가 정말 엉망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아이를 이렇게까지 다치게 할 수 있는지 화가 치밀었다. 글래디는 쓰러져 있던 사자를 향해 달려 있는 그대로 사자의 머리를 짓밟아 버렸다. 주변에 몰려있던 코뿔소들이 몰려들어 사자를 짓밟았다. 사자가 있던 자리에 가죽 말고는 남은 것이 없었다.
타냐는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나 코뿔소들이 도망간다면 사자를 데려가 치료를 하려고 했다. 자신들 때문에 상처받은 동물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코뿔소들이 사자를 짓밟아 버렸다. 코뿔소들이 저 정도의 폭력성을 갖고 있는지 처음 봤다. 이마저도 인간이 초원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일으킨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타냐에게 한동안 말없이 코뿔소들을 바라보고 있던 팡이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곧 날이 어두워질 거고, 코뿔소들이 몰려올 거야. 아직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곧 알게 될 거야. 지금 코뿔소들이 흥분한 상태라 마주치지 않아야 해."
"아니, 팡 저 어린 코뿔소 말이야 치료가 필요해 보이지 않아? 저렇게 두었다간 죽을 거야."
"이 상황에 뭘 하자고? 그럴 여력이 없다니까."
"지원요청해. 헬기 보내달라고. 우리가 데려가서 치료하자."
"무슨 수로? 저 코뿔소들 안 보여? 방금 사자 죽인 거 못 봤어? 몹시 흥분 상태라고."
"방법은 내가 찾아. 일단 지원 요청하고, 가까이 다가가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
팡은 타냐의 말에 안된다고 대꾸하려 했지만 포기했다. 한 번도 타냐의 고집을 꺾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팔도 다친 코뿔소가 걱정됐다. 명색이 팡도 'SAVE THE RHiNO' 단체 소속이었다. 팡은 타냐의 말대로 지원요청을 하고 천천히 코뿔소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코뿔소들은 다가오는 트럭을 발견하고 조금씩 경계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글래디는 트럭을 주시했다. 여차하면 들이받아 버릴 작정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트럭에서 인간 하나가 나왔다. 그 인간은 양손을 번쩍 들더니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글래디는 당장 달려들려고 했고, 그 앞을 게이드가 막아섰다.
"아빠, 잠깐만요."
게이드는 타냐를 알아봤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던 인간이었고, 자신을 배신한 인간이었다. 게이드는 쩔뚝거리며 무리와 인간의 중간에 섰다. 타냐는 2호가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게이드는 타냐를 경계했다. 마치 자신에게 뭔가를 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타냐는 천천히 게이드 곁으로 갔다. 타냐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게이드의 코뿔 위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었다. 타냐의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 한함과 안쓰러움의 눈물이었다. 게이드는 경계했지만 그런 타냐를 그냥 놓아두었다. 최소한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타냐의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게이드의 경계가 조금씩 풀릴 즈음 타냐는 레니 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다른 코뿔소들이 약간 경계하며 달려들려고 했다.
"멈춰!"
와콤이 말했다. 인간은 서서히 다가왔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글래디가 말했다.
"와콤, 인간이 다가오고 있어."
"응 알아. 인간이 레니에게 갈 수 있도록 모두 물러나."
글래디는 와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두머리의 말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와콤은 이전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코뿔소를 돕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와콤 영감도 코뿔을 잘라간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치료를 해줬고, 게이드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총을 맞은 것이 코뿔소들이 아니었고, 사자였다. 어쩌면 인간이라면 지금 레니를 살리려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레니의 옆으로 다가갔다. 레니의 상처를 살피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연신 피를 닦아냈다. 한참을 닦아내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익숙한 것이 나타났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헬기야!! 와콤 헬기가 나타났어."
또다시 흥분한 글래디가 외쳤다.
"응. 아마 레니를 데려갈 거야."
"뭐? 그럼 막아야지"
"그냥 둬. 데려가다면 게이드처럼 치료받을 수 있을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와콤, 인간들은 레니의 코뿔을 잘라낼 수도 있어."
"그깟 코뿔이 뭐! 지금 상태라면 레니는 위험해."
"그깟 코뿔 이라니 봐서 알잖아. 코바영감 그리고 게이드를 보라고."
"코뿔이 없다고 위험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지킬 수 있어. 코바영감은 어쩔 수 없었지만 게이드는 레니가 결국 지켰잖아. "
"그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그럼 레니가 지금 저렇게 죽어가도록 둬도 괜찮아?"
글래디는 할 말이 없었다. 와콤의 말이 맞았다. 어쨌든 지금 레니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의 치료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글래디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와콤은 다른 코뿔소들에게 말했다.
"모두 레니를 두고 이곳에서 떠난다. 레니는... 인간들이 데려갈 거야."
말을 끝내고 와콤은 가장 먼저 달렸다. 자신이 떠나야 다른 코뿔소들도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둘 와콤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게이드는 마지막까지 레니의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인간들에게 겪었던 공포를 레니가 똑같이 겪는다고 생각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게이드에게 글래디가 말했다.
"가자 게이드."
"아빠, 레니를 인간들이 데려가도 괜찮아요?"
"응! 와콤삼촌의 결정이야. 레니는 인간들이 데려가서 치료해 줄 거야. 지금 상태라면 레니는 머지않아 초원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하지만 인간들이 치료를 해준다면 너처럼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지."
"인간들은 레니의 코뿔마저도 잘라버릴 거라고요!"
"일단 지금은 레니가 무사히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것만 생각하자. 와콤삼촌의 말이 맞아. 코뿔이 없어 위험할 땐 우리가 지켜주면 돼. 하지만 레니가 초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우린 레니를 지켜내지 못하게 된 거잖니. 지금은 물러서는 것이 레니를 지키는 일이야."
게이드는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물러서는 것이 레니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28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