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들이 물러서고 헬기와 몇 대의 트럭이 레니를 살피고 있는 타냐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타냐는 레니를 응급처치하고 이송 준비를 했다. 레니의 다리에 체인이 단단하게 채워졌다. 헬기는 레니를 끌어올렸고, 레니는 다리가 하늘로 향한 채 거꾸로 매달려졌고, 헬기는 왔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인간들도 트럭을 몰고 왔던 방향으로 모두 돌아갔다. 타냐는 한동안 코뿔소 무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둠에 가려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코뿔소들이 그곳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얘기해 주고 싶었다. 잘 치료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팡의 재촉에 타냐는 할 수 없이 트럭에 올라탔다.
글래디와 게이드는 헬기에 매달린 채로 날아가는 레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게이드는 아직도 달려가 레니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공포와 배신감 그것을 레니가 느끼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레니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빠와 와콤삼촌이 레니를 인간들 손에 넘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레니의 상태가 더 걱정됐다. 그런 걱정을 눈치챈 글래디가 게이드에게 말했다.
"걱정 마. 레니는 건강하게 돌아올 거야. "
"아빠는 인간들을 믿어요?"
"적어도 레니를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너도 인간들의 '치료'를 받아봐서 알잖니."
"그만큼 쉽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죠.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상처를 낫게 해 줄 거라면 애초에 상처가 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코뿔을 잘라내고, 상처를 입게 만들고, 데려가서 치료해 주고."
"그건... 아빠도 사실 모르겠어. 인간들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코바영감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더구나. 다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레니는 상처를 다 낫고, 건강하게 돌아올 거라는 거지."
"돌아오지 않는 다면요?"
"그렇다면 이제 네가 레니를 구해올 차례지."
"전 코뿔도 없는데요. 제게 코뿔이 있었다면 레니가 그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거예요."
"게이드. 코뿔소가 강한 건 코뿔 때문이 아니야. 지키려는 마음이 코뿔소를 강하게 만드는 거야. 아직 어린 레니가 사자와 싸워 너를 지켜낸 걸 봐서 알잖니."
게이드는 아빠의 말에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자신을 탈출시키고 아빠를 부르기 위해 '쾅'을 성공시켰던 레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방금 전 사자와 맞서는 순간의 레니는 자신이 알던 레니가 아니었다. 작은 체구와 작은 뿔에서 나올 수 있는 것 이상 것. 그것을 언젠가 아빠는 투지라고 했다. 레니가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레니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게이드는 인간이 아닌 아빠와 와콤삼촌 그리고 자신의 친구 레니를 믿어보기로 했다.
보호소로 돌아온 타냐는 레니를 치료했다. 몇 시간에 걸쳐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했다. 상처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대체 이런 몸으로 어떻게 서 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출혈도 상당했고, 찢어진 상처들은 내부 장기까지 훼손이 됐다. 일단 상처를 모두 봉합은 했지만 상태를 안심할 수 없었다. 치료를 마치고도 타냐는 며칠을 레니 곁에서 머물렀다. 상처가 덧날까 때마다 붕대를 갈아주고, 소독해 줬다. 레니는 1주일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상태가 더 악화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호전된 것도 없었다.
레니가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타냐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먼저 '특단의 조치'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들이 '보호'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폭력에 대해. 밀렵을 막기 위한 '특단은 조치'는 임시조치에 불과했다. 밀렵을 막기 위한 것이 코뿔소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특단의 조치'는 어쩌면 멸종을 앞당기는 조치였을 수도 있었다. 멸종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강제로 빼앗아야 한다면, 그것이 그들의 살아있는 의미이자, 살아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어수단이라면 그것을 빼앗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팡이 나타나 말을 걸었다.
"나, 징계받았다."
"사자에게 총 쏜 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지. 명색이 야생동물 보호단체인데 야생동물에게 총을 쐈으니까."
"내가 가서 말할게. 어차피 내가 쏘려던 거였잖아."
"내가 쐈지."
"그거야 내가 못 쏘고 있으니까..."
"그래서 쏜 게 아니야. 내가 쐈어야 했으니까. 어쩌면 네가 쏴주길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널 말려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네가 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네가 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떳떳하지 못했을 테니까. 후회 안 해."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일단 보호소에서는 나가야 돼. 본사에서 사무업무를 담당할 자리를 알아봐 준다고 하긴 했는데 영 안 맞을 거 같아서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다른 일?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총 쏘는 거? 어디 용병이라도 알아볼까?"
"그때 보니까 영 소질은 없어 보이던데. 동물한테도 주저하면서 사람한테 쏠 수나 있겠어?"
"해본 말이지. 솔직히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더 하고 싶진 않아."
"이번 일 때문이야?"
"요 며칠 생각이라는 걸 해봤어. 상처를 주는 건 그냥 상처를 주는 일인 것 같아. 어떤 의미를 갖다 붙여도 상처를 준다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다고 생각이 들었어. 설사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어도, 상처를 받은 기억까지는 낫게 할 수 없으니까. 그걸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있겠어?"
"꽤 괜찮은 생각을 했네. 멋진 생각이야."
"너는?"
"나?"
"고민이 많았잖아. 요 며칠 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너도 생각이라는 걸 했을 거니까. 답은 나왔어?"
"글쎄...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말이 나온 김에 팡, '특단의 조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너랑 같은 걸 봤으니까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너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지?"
"일단은."
"그럼 왜 옳지 않다고 생각해?"
"그야... "
팡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타냐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졌지만 자신도 고민을 하고 있었다. 타냐가 고민을 끝냈다는 듯이 작게 말을 했다.
"묻지 않았으니까."
"응?"
"우린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잖아. 그 답을 코뿔소들에게 묻지 않았으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쉬운 답을 택했으니까. 우리의 문제를 우리 안에서 해결하려 들지 않았으니까. '보호'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 우리의 '보호'를 코뿔소들에게 묻지 않았으니까."
"생각 많이 했나 보네."
<29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