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는 치료를 받고 1주일가량 지났을 무렵 깨어났다. 마취의 영향을 감안하고도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타냐는 걱정이 되어 중간에 깨어볼까 몇 번을 생각했지만 굳이 깨운다고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왕 잠이 든 것이라면 푹 잘 수 있게 잘 보살피는 것이 최선이었다.
깨어난 레니는 금방 기력을 회복했다. 인간들을 훨씬 많이 경계했지만 먹는 것도 잘 먹었고, 쉬는 것도 잘 쉬었다. 레니는 인간들을 믿을 수 없었다. 게이드에게 보호소에서의 일들에 대해 들었다. 길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잘 대해준다고. 있으면 편하고 좋다고. 그러다가 마음을 열었을 때 자신을 배신했다고. 레니는 끝까지 인간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레니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나머지 코뿔소들은 잘 있는지 게이드는 무사한지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탈출을 해야 되는 것인지, 삼촌들이 게이드처럼 구하러 나타날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어 이도저도 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레니 역시 초원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음을 타냐는 느꼈다. 레니의 몸상태가 나아졌고, 시간이 꽤 지나 레니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눈치였다. 그럼에도 타냐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차일피일 레니가 초원으로 돌아갈 날을 미뤘다. '특단의 조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미 특단의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의 뜻이기에 따라야 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함에도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 레니를 돌려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타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불러도 못 듣고 있나?"
"아, 센터장님!"
"응, 무슨 고민 있나?"
"아, 아닙니다.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3호 간호한다고 요 며칠 제대로 잠도 못 잤으니 탈이 날만도 하지. 3호는 어떤가?"
3호는 인간들이 레니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상처는 다 나았지만 아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혹시라도 3호를 내보내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뉘앙스로 타냐가 대꾸했다.
"그럼 내보낼 준비를 해야지."
"네? 벌써요? 아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잊었나 저 녀석들이 사고 치는 바람에 '특단의 조치'가 몇 주나 뒤로 밀렸어. 일정 내에 완수하려면 부지런히 해야지. 이렇게 시간을 붙들어 잡고 있어선 안돼."
"그래도 아직... "
"내일 아침에 특단의 조치 후에 방사하지."
"그건 너무 촉박해요. 내보내려면 준비가 필요해요."
"그 준비를 하라고 지금 얘기해 주는 것이잖아. "
"그래도..."
"그럼 준비 잘하도록."
센터장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타냐의 말을 자르고 떠났다. 타냐는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레니는 방사시키는 준비는 그다지 필요한 것이 없었다. 필요한 것은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한 답을 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상태라면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타냐는 지금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잘못된 것을 알지만 내일 아침 또다시 그 잘못된 일을 해야 한다. 타냐의 고민은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센터장님, 한예 계신가요?"
타냐는 센터장실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신출내기 보호사의 말을 센터장이 듣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타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를 설득하는 일. 잘 된다면 며칠 시간을 더 끌어볼 수도 있을 수도 있었다.
"응 있네."
중후하려 노력하는 저음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타냐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이 늦었지만, 늦은 만큼 고민했을 테니 말해보게"
"특단의 조치 말입니다."
타냐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단호함을 보여주기에는 이 시간을 끝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특단의 조치? 아, 내일 3호에 대한 준비에 이상이 있나?"
"아니 그게 아니라 '특단의 조치'를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멈추다니? 갑자기 왜?"
"제가 초원에서 목격한 바로는 코뿔소에게 코뿔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에요. 코뿔이 없어서는 야생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건 인간에게 총을 빼앗고 알몸으로 야생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센터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긴 침묵을 깨고 센터장이 타냐에게 물었다.
"왜 '특단의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하서는 알고 있지?"
"당연히 밀렵을 막기 위해서죠."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코뿔소들을 보호하는 거죠."
"정확히는 멸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지."
"코뿔이 없는 코뿔소는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코뿔이 있다면 밀렵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없지. 지금 코뿔소를 가장 많이 죽게 만드는 것은 밀렵이야."
"밀렵을 막더라도 코뿔소들이 멸종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예요."
"밀렵을 막지 못하고는 그 시간마저도 없어."
"우린 코뿔소들에게 묻지 않았어요. 우리의 보호를 코뿔소들이 바라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코뿔소들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고 밀렵을 막는 일이야. '특단의 조치'말고 당장 밀렵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자네에게는 있나?"
"그건..."
"없어. 밀렵꾼을 잡아내도 그들은 다시 나타나네. 코뿔이 아무런 효능이 없다고 얘기해도 그걸 찾는 사람들이 보호하려는 사람들보다 많아. 그 밀렵을 막기 위해 우리는 '특단의 조치'를 생각해 냈어. 그 방법 외에는 코뿔소들을 밀렵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은 없어. "
"코뿔소들이 원하지 않아도요?"
"우린 우리의 일이 있어. '특단의 조치'는 우리의 일이고, 우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네."
"코뿔소들에게 코뿔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요?"
"살아남는다면 살아갈 방법을 찾겠지. 코뿔소들이 야생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건 우리가 나서야 할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인간으로부터 코뿔소들을 지켜내는 게 일이라고. 더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네. 우리의 방식이 맞지 않는다면... 떠나 주게."
타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떠나라는 말까지 들은 이상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얘기는 없었다.
"그럼... 쉬세요."
타냐는 그 말을 끝으로 센터장실에서 나왔다. 문 너머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문을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타냐는 생각했다. 들어가서 뭔가 얘기를 나눈다면 방법이 생길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들어가기 전보다 더 나을 것은 없었다.
<30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