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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Apr 11. 2020

내우외환과 유비무환

안과 밖의 온갖 위협으로부터 나와 우리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우리를 평안하지 못하게 만드는 안과 밖의 위협(threat)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안과 밖으로부터의 위협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고 바꾸어 쓸 수도 있다. 안으로부터의 위협은 내우이고, 밖으로부터의 위협은 외환이다. 안과 밖의 온갖 위협으로부터 나와 우리, 우리나라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우외환(內憂外患)에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최선책이다.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부족해서 내우외환을 겪었던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고, 잘 대비해서 내우외환을 이겨낸 경우가 있는지도 기억해 보려고 한다.


선조가 이이(李珥)의 십만 양병설(十萬養兵說)을 새겨듣지 않아서 임진왜란의 수난을 겪게 되었다는 등의 왕조(王祖) 시대 얘기는 뒤로하고 지난 100여 년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뒤돌아 보자.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 강점기는 밖으로부터의 위협인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 점령을 막지 못함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절 안으로부터의 가장 큰 위협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고위 각료들과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 제국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렸던 친일파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의 조부모 이전 세대는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고 35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1945년 8월 15일, 우리의 조부모 세대는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잠시 맛보았다. 하지만 곧이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군사정권이 남한과 북한을 각각 통치하는 3년간의 미소 군정기(美蘇軍政期)를 겪게 된다. 당시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과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의 입장에서 일련의 군사통치 정책을 마련하였다. 특히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청은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당시 기득권층의 친일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일파의 도움을 받아 남한 지역을 통치함으로써 오늘날까지 국내적으로 유명인사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일제 통치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바로 밖에서 온 미국과 소련의 군사통치를 받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래야만 했을까?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하에 남한 지역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동년 7월 17일 헌법을 선포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주의 정권의 지도자인 김일성은 남한 지역까지 공산화하기 위해 소련제 탱크부대를 선두로 38도선을 넘어 기습적인 무력 남침을 시도하였다. 개전 초부터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우리 국군은 부산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은 유엔군은 다시 반격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10월에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11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유엔군은 12월에 북한지역에서 철수하였고, 1951년 7월부터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정전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왜 전쟁 초기에 한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부산 지역까지 후퇴해야만 했을까? 당시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만의 힘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낼 수 있었을까?


1948년 대한민국 수립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초대 대통령이 된 미국 유학파 이승만은 6.25 전쟁을 거쳐 1960년까지 12년간 3차례에 걸쳐 헌법을 두 차례 개정하고 부정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민혁명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되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정부에서 문맹률을 낮추고 국민 개개인의 실력 배양을 위해 추진한 국가 시책으로 배출된 수많은 학생들이 오히려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키는 최일선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4.19 시민혁명으로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와 이를 계승한 장면 정권은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후 2년 7개월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박정희에 의한 군정(軍政) 기간이 있었다.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박정희는 재건 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하여 가족계획, 문맹퇴치화 운동 등 국토 및 경제 개발 계획에 착수하였다. 1963년 군복을 벗은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산업화를 통해 경제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승만처럼 장기집권을 위해 3선 개헌, 유신 개헌 등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 일도 있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격당하면서 급 서거하였다. 박정희는 산업화의 기초를 다진 공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왜 그가 16년간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 정치를 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 서거 후,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1980년 8월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간선제 투표를 통해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에 의한 군부통치 기간 중 1987년 민주화 항쟁이 발생하였으며, 전두환은 당시 무력 진압 관련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박정희 시대에 군사정권을 경험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또다시 군사정권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군부통치가 종식되는 과도기에 육군 대장 출신인 노태우가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이후로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까지 진보와 보수를 번갈아 가면서 문민 대통령 시대가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살펴본 바와 같이 외환은 일본의 강제 점령과 북한의 남침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다. 내환에 해당하는 것은 두 차례의 군사쿠데타와 같은 내부로부터의 위협이었다. 이와 같은 외환과 내우를 겪게 된 근본 원인을 살펴볼 때, 외환을 겪었던 것은 나라의 힘인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국가를 지킬 수 있는 방위력으로서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반면, 군사쿠데타와 같은 내우를 겪게 된 연유는 전쟁 이후 군대의 힘이 너무 강해졌고 상대적으로 시민의 힘은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촛불 혁명으로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에 성공한 문재인 정부에서 시민의 힘은 매우 강력해졌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시민들은 5.16이나 12.12와 같은 군사쿠데타를 두 번 다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요즈음 군대의 힘은 많이 빠져있는 듯하다. 적폐 청산 명목 하에 4성 장군이 의혹만으로 포승줄에 묶인 채 포토존에 서는가 하면, 남북 군사합의 이후 한미 연합훈련도 대폭 축소된 상태이다. 동맹국 대통령인 트럼프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강요하고 있고, 코로나-19 팬데믹의 국제적 위기에도 북한은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강행하고 있다. 70년간 한미 연합 방위체제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여 왔는데, 그 체제가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주한 미군 철수를 외치기도 한다. 한미 연합 방위체제에선 지상구성군사령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구성군 사령부가 한미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지상군을 제외하면 대부분 미군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군 단독으로 작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한 미군이 철수할 경우, 유비무환의 태세는 흔들리는 것이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나만의 기인지우(杞人之憂)일까?


한편, 요즘 우울한 가운데 기쁜 소식도 있다. COVID-19 팬데믹에 대처하는 우리의 유비무환 자세가 국제사회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SARS와 MERS-CoV 사태로부터의 얻은 교훈과 경험 축적을 통한 방역 및 의료 전문가 집단의 과학적 대응, 국수주의적 고립을 피하고 국제적 연대를 택한 원자재 수입 의존국으로서의 자세, 사재기를 하지 않는 높은 시민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유비무환 태세는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는 나와 우리를 당분간은 지켜 줄 것이다.


나라를 안과 밖의 위협으로 지키는 것을 국가 안전보장, 즉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라고 한다. 국가안보는 "공기 중의 산소"와 같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그 필요성을 잘 모르다가 공기 중의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에 올라가면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과 같다. 국가안보는 안과 밖의 위협이 없을 때는 잘 모르지만, 그 위협의 강도가 심해지거나 위협을 막아내기 어려울 때가 되어야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위협이 나와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오기 전에 강력한 군사력으로 외부의 위협을 막아내고, 높은 시민의식으로 내부의 위협 요인을 사전 제거할 수 있는 유비무환 태세를 갖춰야 한다. COVID-19의 위협을 잘 막아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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