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초등학교 시절 5월이면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힘차고 즐겁게 부르던 노래다.
“일본강점기에 어린이를 무척 사랑하셨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을 만드셨어요.”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어린이날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일반적인 가정에서 어린이날에 부모님으로부터 선물을 받는다거나 선물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서 어린이날이라고 해서 받았던 선물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보, 어렸을 때 어린이날이라고 부모님에게서 선물 받아본 적 있어?”
나만 그런지 궁금하여 어제 집 근처의 달빛 공원에서 산책 중에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그 당시에 어린이날이라 해서 부모님에게 선물 받는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그 당시에는 생활이 힘들어 명절 때 새 옷 하나 사주시면 그것이 그렇게 고맙고 좋았지.”
역시 나도 마찬가지라 옛 추억에 젖어 정겨운 대화를 나누면서 산책을 하였다.
따라서 어린이날 선물로 부모님에게 바라던 선물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사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전주에 텔레비전이 방영 개시되기 전인 1966년 6월 25일.
저녁에 우리 식구 중 남자들 및 이웃집 아저씨와 형들 10여 명이 집 앞마당의 평상에 둘러앉아서 빨간 라디오 하나를 가운데 놓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전국에 계신 권투 팬 여러분들 드디어 우리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이기고 우리나라 최초의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국민 아나운서였던 이광재 아나운서의 감격 어린 멘트에 라디오를 둘러싼 사람들은 흥분하여 소리치고 서로 부둥켜안고서 즐거워했다.
기쁨에 겨워 위를 쳐다보니, 별들이 산언덕에 만개한 봄꽃처럼 하늘에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나의 고향 전주에는 내가 중학교 1학년 시절(1969년경)에 텔레비전이 처음으로 방영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만도 벅찬 감동을 느꼈던 시절에, 몇 번 보았던 영화처럼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텔레비전은 어린 나에게 무척 경이로운 존재로 생각되었다.
어디에 가면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지 물어봐서 시청 앞 번화가의 전파상을 찾아갔다.
전파상 진열장에 있는 사과 상자만 한 곳에서 당시 월남에 파병되는 국군들의 모습을 포함하여 그 안에서 움직이는 영상을 몇 시간 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을 사주라고 부모님에게 졸라보고 싶었지만, 당시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그러한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만홧가게에서 돈 10원(아마 10원이었던 같다. 아니면 1원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을 내고서 1시간씩 보는 것으로 갈증을 달래야만 했다.
당시는 채널은 KBS 하나였으니 보는 사람들이 채널 싸움을 할 염려는 없었으며, 흑백 영상을 보면서 그저 즐거웠다.
현재와 같이 채널 수십 개를 놓고 무엇을 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당시의 행복감이 매우 컸던 것은 아마 때 묻지 않았던 순수한 감성을 품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도 텔레비전 있는 집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보았어.”
아내의 말에 나도 그 시절이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맘속에 그려진다.
두 딸이 어렸을 때 서울시청 옆에 위치한 건물에서 근무하였다.
어린이날 전날에는 근무시간에 상사의 눈을 피해 근처의 롯데, 신세계, 미도파 백화점에서 두 딸의 선물을 사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사줘야 이놈들이 좋아할까?’ 하고 고심하였던 때가 그립다.
올해는 며칠 전에 어버이날에 앞서 두 딸이 상의하여 큼직하고 예쁜 카네이션을 사서 거실에 있는 성모님 상 앞에 놔주었다.
맛있는 저녁을 사줄 시간을 내주라는 큰딸의 제안에 감격하였지만, 어린이날에 선물을 줄 사랑스러운 대상이 없어 아쉽다.
작은딸의 배 속에 있는 손주에게 어린이날에 어떤 선물을 사줄까 고민하는 즐거움을 주시기를 하느님에게 기도드린다.
“Happy and joyful Children’s Day!”
(2020.05.05.에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