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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Jun 03. 2019

바뀌는 게 아니라, 모두 될 거야!

영화, <파리의 딜릴리>

바뀌는 게 아니라, 모두 될 거야!
영화, <파리의 딜릴리>


<프린스 앤 프린세스>, <밤의 이야기>, <아주르와 아스마르>의 미셸 오슬로 감독의 작품이다. 미셸 오슬로를 밤과 색으로 세상을 그리는 마법사라 칭한다면 <파리의 딜릴리> 역시 감독의 마법이 깃들어 있다. <파리의 딜릴리>는 시대적 배경인 벨 에포크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색채가 인상적이다. 특히 영화가 비추는 파리의 밤은 황홀함 그 이상이다. 당찬 딜릴리와 친구들의 모험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밤이 찾아온다. 그들은 살금살금 다락방을 올라가고, 그 옥상에서 손을 꼭 잡은 채 파리의 밤을 마주한다. 바라보는 전경은 스크린을 넘어 우리에게 찾아온다. 단 한 군데도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는 이 판타지는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때론 말도 안 되는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얻는다. 딜릴리가 보여준 파리의 밤은 비록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일지라도 정확히 마음에 닿는다. 실사 영화에서 얻을 수 없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은 감히 이런 것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 그중에서도 벨 에포크이다. ‘벨 에포크’는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라는 뜻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예술·문화가 번창하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을 한 신사 숙녀가 넘쳐흘렀다. 물랭루즈와 레스토랑 맥심으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꽃의 파리를 이루었다. 그 후 외교면에서나 경제면에서나 쇠퇴와 핍박이 계속되어 1900년대 초의 파리를 아는 사람들은 한없는 애착심을 가지고 이 시대를 ‘좋은 시대’라고 불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 영화는 파리를 향한 사랑 고백이다”는 감독의 말처럼 <파리의 딜릴리>는 벨 에포크의 풍경뿐만 아니라 파리를 만들었던 사람들에게도 주목한다. 100명 가까이 되는 예술인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퀴리 부인, 파스퇴르, 피카소, 로댕, 모네, 콜레트 등 분야를 막론한다. (실물을 그대로 빼닮은) 인물들은 그들의 마스터피스와 함께 나오고 주인공인 딜릴리의 입장에서 짧게나마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다만 파리의 인물들을 너무 사랑한 탓인지 주인공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자주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한 명 한 명 다 짚고 넘어간다면 다소 복잡할 수는 있겠다. 머리 싸매는 영화가 아니니 모두를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벨 에포크를 지나다니는 것처럼 영화를 감상해보자. 스치는 사이, 이름 모르는 벨 에포크의 예술인이 당신을 두드릴지도 모른다. 또는 딜릴리처럼 귀엽게 메모를 해도 좋을 듯 하다.



미셸 오슬로 특유의 색채는 통상 여겨지는 파리의 아름다움과 같다.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파리의 딜릴리>는 파리의 이면을 메시지로 가진다. 파리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 동시에 인종-계급-성으로 억압을 규정했던 제국이다.

오프닝에서는 딜릴리의 모습을 줌 아웃하며 시작한다. 놀라운 시작은 ‘인종 전시’가 아무렇지 않았던 파리-를 비롯한 제국들-에 대한 충격으로 끝나진 않는다. 시작에서 짐작되는 딜릴리의 상황은 곧이어 의도적으로 깨부숴진다. 딜릴리가 우아하게 마차를 타는 모습에 ‘간극’은 거울이 된다.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는 초반부터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내비친다. ‘파리가 나를 지켜봤듯이 나도 파리를 지켜볼 차례’라는 딜릴리의 말은 인상 깊다.

인종과 성별은 교차되어 딜릴리를 억압한다. 특히 주인공 딜릴리가 카나키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이라는 설정은 교차성과 복합성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하얗다고 괴롭히지 않는 나라를 찾아 프랑스에 왔는데 이번에는 내가 너무 까맣대’라는 대사로 함축되는 딜릴리의 서사는 어디에도 낄 수 없었던 정체성을 보여준다. 영화가 이 부분을 깊고 무겁게 파고들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인종과 성별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두 가지 층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 사람을 억압한다면 한 가지만 해결한다고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스릴 가득한 자전거 라이딩(?) 장면


영화 속 파리에서는 여자 아이들이 계속해서 사라진다. 의심되는 범인은 범죄조직인 ‘마스터맨’. <파리의 딜릴리>는 로드무비 위 미스터리가 깔린 성장 영화이다. 딜릴리는 소년 오렐과 함께 ‘마스터맨’을 추적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결국 딜릴리는 마스터맨에 의해 ‘네 발’이 되도록 훈련받는 여성들을 구출한다. 구조와 스토리는 깔끔하고 단순한데, 시각(벨 에포크 시대)의 풍부함과 시사적인 메시지 때문에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파리의 딜릴리>는 매우 직관적인 대사로 페미니즘을 전달한다. 만약 페미니즘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이 오로지 직접적인 대사였다면 조금 아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는 직접적인 대사와 스토리 이외에도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파스퇴르와 로댕의 만남에서, 그들은 자신의 동료인 여성 파트너를 언급한다.(로댕의 경우에는 까미유 끌로델, 파스퇴르의 경우에는 부인으로 짐작한다.) 

그간 예술의 역사는 남성의 얼굴을 대표되었다. 여전히 교과서를 펼쳐보면 여성 인물의 역사와 서사는 찾기 힘들다. 역사의 기록은 권력과 직결되며 주도권은 항상 남성에게 있었다. 이는 젠더뿐만 아니라 역사관에 있어도 문제적인 불균형이다. 당장 나만 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 이렇게나 많은 여성이 역사를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는 남성에게만 치우쳐졌던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이 조명되어야 한다. 불균형한 역사를 다룰 때, 대중문화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파리의 딜릴리>는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 가려졌던 여성 예술가들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대사와 인물 구성을 통해 언급한다.



후반부에서는 딜릴리와 친구들이 힘을 합쳐 지하도에 납치당한 여자아이들을 구출한다. ‘네 발’로 바닥을 기어 다니게 해서 남성의 권위를 감히 넘볼 수도 없게 하겠다는 남성우월집단 ‘마스터맨’은 여성을 자신들의 발밑에 위치시킨다. 그곳을 경험한 딜릴리는 굴뚝을 올라가는 탈출을 제안한다. 가장 아래에서 가장 위를 향하는 여성들의 탈출은 시각적 표현 이상의 울림을 전달한다. 또한 탈출 수단인 비행선이 뜰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서 딜릴리는 ‘페달을 함께 밟으면 된다’고 말한다. 영화는 피해자를 구해줘야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피해자의 피해자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함께 페달을 밟아 탈출하는’ 연대를 표현한다. 그동안 재난 영화에서 죽거나 힘없이 구출당하는 무기력한 여성상으로부터 느꼈던 피로함이 떠오른다. 영화의 재현에서 여성 캐릭터가 구해줘야 할 대상이나 보상으로 제공되는 트로피로 그려지지 않을 날을 역시나 기다린다.

(그러나 이미지 전달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 또한 분명 존재했다.)



영화가 어딘지 아쉬웠던 것은 부조화에 있다. <파리의 딜릴리>는 벨에포크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달하며 그 속에 가려진 차별을 인식한다. 하지만 명확히 짚어내진 않는다. 풍요로운 제국이었던 ‘파리’라는 공간에서 혼혈로 차별받는 주인공은 ‘귀족’의 도움을 받는다. 딜릴리의 모험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부유하고 착하고 아름답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을 위협하며 심술궂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선악은 명확히 구분된다. 영화에 따르면 위인들과 부자들은 딜릴리에게 도움을 주는 착한 사람이고 가난하고 음침한 사람들은 딜릴리를 위협하는 사람이다. 

미묘한 부조화는 다시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간다. 딜릴리가 ‘전시’될 때 그를 바라보며 즐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모두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은 파리의 백인들이다. 하지만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영화에서 부유한 백인은 딜릴리의 조력자로 나온다. 부유한 백인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명백하게 백인 부르주아에 의해 차별받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영화는 악인을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 여성 밑에서 일하는 ‘하인’, ‘마스터맨’으로 국한시킨다. 자칫하면 일부 특정한 (나쁜) 사람들만 차별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다. 시대와 역사가 반성해야하는 문제점을 바라볼 때 그 문제를 개인의 특성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간소화시킬 위험이 있다. 하물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려 선인으로만 그리는 시선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파리의 딜릴리>는 충분히 만족스럽기에는 아쉬운 영화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미셸 오슬로와 다음을 기약한다. <파리의 딜릴리>를 통해 애니메이션이 시각적으로 즐거울 뿐만 아니라 실사 영화보다도 인상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음을 알아 간다. 특히 역사를 재조명하는 애니메이션이 풍부해지기를. 


무엇보다 딜릴리가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며 딜릴리와 오렐의 대화를 전한다. "딜릴리는 커서 되고 싶은 게 매번 바뀌네?" "바뀌는 게 아니라 모두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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