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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topian Jul 15. 2024

요즘처럼 힘든 시기의 명상

매일을 사는 것으로도 벅찬데 세상은 어디로 가는가?

모두의 바람이 하늘을 가린다. 어디에 사는 누구누구의 아내, 딸, 아들, 어머니, 아버지, 남편,,,  소원을 비는 마음이 하늘을 가린다.

대웅전  햇빛이 내리쬐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성을 다하고 있다.  이 소원을 비는 마음들은 언제나 간절하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도 될지 모르나 지금 벌어지는 가슴 답답한 세상사는 그 어느 때보다 더한 것 같다.

어쩌면 다행인가?  세상사를 신경 쓸 만큼 개인사는 괜찮은 것인가?

  기도를 드리는 곳을 찾는 사람들 그 간절한 마음에는 누군가를 헤치게 해 주세요는 없을 것이다.

가족의 안녕과 자신들의 뜻하는 일들이 잘 되기를 마음들로 진심을 다하는 순간이다.

 이제 기도를 마치고 길을 나가는 동안 주차장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먼저 가시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1분도 되지 않을 것이나 경적이 울리고 이내 더운 햇볕에 뜨거워진 사람들의 신경은 날카롭게 부딪힌다.

우리는 도대체 무슨 직을 하고 있나?

나를 포함한 사람의 욕심이 두려운 날들이다. 어쩌면 그렇게 진심으로 바라던 마음은 “나만 잘살면 돼!” 였을까?  

언젠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이 큰소리치던 말이 생각난다.

“나만 아니면 돼!”  그 말들은 어린이들의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혹은 그래도 되는 것처럼 여겨져 몇 차례나 반복된다. 그다음 주에도 그 그다음 주에도….

이젠 다른 출연자들까지 따라 한다. 마치 방송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던져준 듯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재미를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번 했는데 괜찮은 거 같아서 아예 유행어처럼 쓴다.

무지막지한 무지일까 아니면 인기를 얻는 방법이니 생각 없이 질러대는 것일까?

그러다 “아!” 나도 언젠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휴~ 다행이다 “라고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독일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나도 왠지 모르게 1차선에서 버젓이 있지 않고 더 빨리 달려오는 뒤 차에 길을 내어준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국에서는 왠지 뒤에서 바짝 붙어오면 오기가 생기거나 그냥 안 비켜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소인배인 나라서 그런 것인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지만 그냥 대충 하게 된다.

분명 추월선 주행선이 있음에도.

때론 그런 룰을 나라도 지킨다 라며 뒤에 오는 차에 길을 내어주고 2차선으로 달리고 있으면 조바심이나 1차선으로 옮기면 거기엔 또 다른 내가 있다.

그러면 다시 2차선으로 가 추월한다. 결국 ‘왜? 나만”이라는 생각에 규칙은 의미를 잃는다. 깨진 창문 이론처럼 하나 둘의 작은 틈은 전체를 무너뜨린다.   


지금 하나 둘의 규칙들이 짧은 시간에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오히려 룰을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된 지금 정직과 선함은 어리석은 자의 미숙함이다.

명예와 존경을 중요시할 사람들이 서슴없이 자기 살겠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것도 몇 분 전에 한 말도 번복하거나 사회적인 인식의 상식은 무시한 채 스스로 하는 행동과 말이. 아무리 비겁하거나 부도덕할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예전보다 더 온라인이 된 지금 그들의 말이 하나하나 박제가 되고 있어도 안하무인이다. 저들이 왜 저럴까? 충분히 성인이고 장년이며 심지어는 학생 때는 나름 뭐 좀 한다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아내와 자식 그리고 부모와 사회적인 관계도 있을 텐데 부끄러움과 수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 좁디좁은 생각과 미세한 인간성으로 어떻게든 면피하려 애쓴다.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이 사회상에는 현명한 선택일까?

진흙에서 피어난다. 진흙이 꼭 더럽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게 보이니까 은유를 했을지 모르지만 이 연꽃은 그 진흙을 견뎌 나와 깨끗하다 못해 순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꽃을 피운다. 결국 이 진창 같은 날들이 지나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눈떠보니 선진국은 눈도 다시 감기 전에 암흑의 중세시대가 되어 버린 현실에 견뎌야 하는 것일까?

 나를 찾고 나를 지키는 명상을 한다. 가만히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내 마음속 일렁임과 분노는 잠재우나 눈뜨면 현실이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바람이 모여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동물 혹은 사람이라는 종류는 지금과 같이 이전시기의 그렇게나 많은 실패의 사례와 인간 답지 못함의 사례에서 배우지 못하고 있나?

인식을 뒤덮을 만큼 욕심이나 자만심은 거대한 것일까?

 당장 몇 억이 주어진다면  “셨더 마우스” 하게 될 것인가.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도 약간의 두려움 혹은 약간의 이득이면 바로 잠잠해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더 편리하고 더 남들보다 우월감을 가지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여지없이 녹아내리는 것일까?

간과 쓸개라도 내어주면서.

나는 어디까지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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