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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을 밝히고

무명(無明)과 지혜(知慧)

by 이용태

‘무명을 밝히고’라는 불교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어둠을 밝히고’ 란 말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무명(無明), 어둠의 반대말은 무얼까?

지혜 지(智), 아래에 해를 뜻하는 날 일(日)이 있고, 위에 알 지(知)가 올려져 있는 한자어다.

밝은 태양이 자리하고 있으니, 모든 것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니, 알 수밖에 없는 상태란다.

그래서 지혜(智慧)란 배워서 아는 지식(知識; 빅데이터에서 각각의 데이터가 지식, 정보에 해당)과 다르고, 이런 지식을 다루는 능력인 지능(知能; 빅데이터 활용하여 솔루션을 제시하는 AI(인공지능)이 이에 해당)과도 다르다.

통찰(通察), 그냥 탁 보이는 것이니, 안목일 수도 있겠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경험해 보 적도 없는 미지의 상황에서도 내다볼 줄 아는 안목, 그게 지혜란다.

여러 명상가들이 전구, 등대, 번개, 유레카를 외치는 광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런 상태랄까?


컴컴한 어둠 속에서는 앞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은 모두들 잘 안다.

그런데 또 다른 어둠이 있다. 오래전 시골 외할머니댁 정지(부엌 아궁이) 위에 자리한 다락방에 올라가 본 적이 있다.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다. 평생 모아만 두었지, 버리고 비울 줄 몰랐던 결과다. 돌아가신 후, 후손들이 싹 다 내다 비우고 나니 비로소 보인다. 저렇게 넓었구나, 저 공간을 이렇게, 저렇게 쓸 수 있겠구나...


노자의 도덕경의 어느 구절이 생각난다. 그릇은 찰흙으로 만들었으나, 그 안이 비어 있어서 그릇으로 쓰이게 되고,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들었으되, 가운데가 비워져서 방으로 쓸 수 있다 하였던가?

<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결국은 비움이다. 비워야 보이고, 보여야 어떻게 쓸지, 그 채움이 가능하게 됨을..


단 한순간도 쉼 없이, 비움 없이 오만 가지 잡념들로 머릿속을 꽉 채워두고 있으니, 보일 틈이 없다. 어둠으로 가득 찬 무명, 무지의 상태다.

이래서 멈춤과 쉼을 통해 비워야 비로소 보이게 된다고 하나 보다.


또 다른 종류의 무명이 있다.

어찌 보면 가득 차 틈이 없는 어둠이 검정이라면,

이번엔 하얀 백지상태..., 이 또한 무명이다.

명상과 멍 때림이 같은 듯 다른 이유이다


멈추고 비웠을 수는 있으나,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다.

졸거나 자고 있는 상태랄까?

잡념으로 가득 찬 거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만가지 잡념으로 채워진 건 아닐지라도 큰 충격에 빠지거나, 알아차림을 거부하여, 지금 여기가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인식을 빼앗기거나,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다.

하얗게 질렸다고나 할까? 이 또한 무명이다.

흰색과 투명은 다르다.

흰색도 검정처럼 결국은 여러 색깔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다.


결국 명상은 비움과 알아차림이다.

명상의 한자말을 보면, 그윽할 명(冥) 또는 눈감을 명(瞑)과 생각 상(想)으로 이루어져 있다. 冥(어두울 명)자는 冖(덮을 멱)자와 曰(말씀 왈)자, 그리고 六(여섯 육)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말씀은 물론 모든 인지(육감)까지 덮었으니, ‘잠재운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도 있으니, 명상이란 생각(想)을 잠재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눈을 감고 잡생각을 잠재운 고요한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비워져서 훤히 들여다 보이니,

온갖 잡념으로 가득 찬 어둠으로 보이지 않거나,

허상에 사로잡혀 하얗게 질려버린 멍한 상태가 아니라,

잡념임을 알아차리니, 허상은 저절로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펼쳐진 상태가 훤히 보이게 되는 것이다.


분주한 일상의 잡념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고 바라본다.

참 밝고 맑은 개울이다.

그 속을 노니는 작은 물고기도 보이고, 크고 작은 돌멩이들도 보인다. 뭉게구름 드리워진 파란 하늘도 비춰진다.

하늘인 듯, 개울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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