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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Jun 30. 2021

어느 아침풍경

하와이 사는 이야기

동쪽 바다의 아이들

어떤 소리에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 소피가 "세라 아빠~" 하고 몇 번 불렀을 것이고, 나는 잠결에 그 말을 듣다가 뇌가 일어나라고 자꾸 신호를 보내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아마도. 잠에서 깨면 나의 뇌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쁘다. 우선 세라의 소재 파악이 가장 중요하다. 세라가 집 나간 것이 아니라 세라의 위치에 따라 내가 지금 바로 일어나야 하느냐, 1~2분쯤 더 자도 되느냐가 판단되기 때문이다. 

세라는 밥을 먹었을까? 욕실에 들어갔을까?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소재 파악은 금방 된다. 숟가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느냐, 욕실에서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나느냐만 알면 된다. 오늘 내가 잠에서 깬 시간에는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어... 조금 늦었군. 자 이제 저 물소리가 그치면 나는 욕실에 들어가야 한다. 준비.... 하나, 둘, 셋, 물소리가 멎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대충 정리한 다음 욕실로 간다. 세라는 역시 물기를 닦고 있다. 

둘 다 거의 아침에는 정신이 없으니 본척만척한다. 내 샤워시간은 우리 집에서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와이프는 나도 10분쯤 걸린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엔 5분도 안 걸리는 것 같은데. 나는 샤워하는 시간만 따지는데, 혹시 와이프는 옷 벗고, 물기 닦고, 다시 옷 입고, 면도하고, 젤 바르고, 머리빗는, 욕실 내에서의 모든 필수 불가결한 일을 몽땅 포함하는 건 아닐까? 아주 심플하게 욕실에서 나온 시간에서 들어간 시간을 빼는 것 아닐까? 나는 샤워한 후 아침을 먹고, 옷을 입는데, 세라는 밥 먹은 후 샤워를 한 다음 옷을 입는다. 

소피는 가장 먼저 일어나는데, 그때는 내가 자고 있어서 아침을 먹는지 안 먹는지 자세히 모르겠다. 이건 짐작인데, 소피는 알람을 듣고 일어난 후 소파에서 4~5분 정도 졸다가 정신을 차린 후 세라 아침을 차려놓는다. 그리고 샤워를 한 후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세라 또는 나, 둘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면서 누군가 적어도 한 명은 깨우는 것일 게다. 보통 세라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밥을 먹는다. 나는 이게 신기하다.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세라와 내가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는 동안 소피는 화장대 앞에서 아침시간 대부분을 보내다. 중간중간에 내가 샤워하고 나오면 밥을 차려주기도 한다. 밥과 국, 반찬 한 가지 또는 두 가지로 대단한 아침 밥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는다. 

세라가 옷 입고 나오면 머리를 빗어 묶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뭔가를 찍어 바른다. 나는 뭘 바르는지 잘 모른다. 그렇게 오래 거울을 보고 얼굴에 뭔가를 열심히 바르는데도 얼굴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이때 우리 집 TV에서는 CNN 뉴스나 로컬뉴스, ABC 뉴스가 나온다. 다이앤 소이어, 라빈 로버츠, 그리고 또 찰스 깁슨 등이 나와서 매일 한결같이 주절주절 잘도 떠든다. 시계는 7:50이라는 숫자를 깜박인다.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 셋은 모두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양치질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먼저 양말을 신은 후 알로하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는다. 와이프는 거실과 키친을 대강 마무리하고는 급하게 들어와 옷장 앞에 선다. 가끔씩 부딪힐 뻔도 하지만 실제로 부딪히기보다는 서로의 방향에 조금씩 방해를 받을 뿐이다. 서랍에서 지갑과 키를 챙기고, 거실에서 어제 잘 때 충전해놓은 셀폰을 주머니에 넣고 신발장을 연다. 1번으로 문을 나서는 것은 세라, 2번은 나, 3번은 소피다. 최소한 오늘은 그랬다. 이 순서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내가 1번이 되기도 하고, 소피가 1번이 되기도 한다. 문을 열면 상큼한 공기, 따스한 햇살이 가슴에 확 다가선다. 


(2009.1.27)




세월이 지나면서 생활이 많이 달라졌다. 위의 글을 쓴 2009년에는 세라가 9학년이었을 때다. 1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잠은 일찍 깬다. 5시쯤에 깰 때도 있고 6시가 넘어서 깰 때도 있다. 시계를 보고 또 자다가 8시에 깨기도 한다. 소피는 6시 30분쯤 샤워를 하고 7시 조금 넘어서 출근한다. 아침은 먹을 때도 있고 안 먹을 때도 있는 것 같다. 세라는 지금 집에 없다. 보스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서 일을 하다가 지난해에 하와이로 왔었다. 하지만 2주 전에 두 달 정도 일정으로 뉴욕에 갔다. 두 달이 더 걸릴지, 뉴욕에서 아예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은 온라인으로 하니 어디서 살든 상관이 없다. 나는 전화기로 뉴스와 유튜브 등을 보다가 8시 30분이나 9시쯤 일어난다. 간단히 요가를 하고, 샤워하고, 아침을 차려먹는다. 코로나로 아직 회사에 못 가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만약 회사에 나가게 되면 6시에는 일어나야 할 것이다. 


지금보다 아이를 한창 키울 때가 몸과 마음이 훨씬 더 바빴다. 그 나이 때의 직장 일도 일이거니와 아이에게 들어가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이에게 들어가는 시간은 한국보다 미국에서가 더 많은 것 같다. 요즘 한국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부모의 시간이 아이에게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아이들을 방목했다. 미국에서는 일단 아이들 학교에 부모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이 아주 가까우면 걸어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차로 데려다줘야 한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일부 차를 사주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등 스스로 등하교할 수 있지만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는 부모가 픽업한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든 고등학교든 2시 반~ 3시 반 정도에는 다 끝난다. 세라를 픽업하느라 직장에서 일하다가 매일 나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나는 세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침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픽업했다. 오죽하면 세라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마치 내가 졸업한 기분이 들었을까? 더 이상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려올 필요가 없는 자유가 마치 의무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아이의 나이에 따라 생활의 패턴이 바뀌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바다에 자주 갔다. 아이는 모래에서 놀거나 바다에 들어가고 소피와 나는 자리를 깔고 비치에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서점에 자주 갔다. 아이에게 책을 가깝게 해 주기 위한 점도 있지만, 나도 커피를 마시며 신간을 둘러보는 시간이 좋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기도 했다. 중학교 다닐 때는 드라이브를 많이 한 것 같다. 섬을 도는 드라이브는 하와이 초창기부터 계속했다. 노스쇼어에 가서 쿠아아이나 버거도 먹고, 할레이바에서 커피도 마시고, 돌 파인애플 농장에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카일루아에 가서 경치도 구경했다. 고등학교 때도 주말에는 드라이브를 다니긴 했지만 학교 행사와 관련된 일정이 많았던 것 같다. 여기저기서 스테이지 밴드 공연을 하거나 학교 축제에 학부모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사립 고등학교여서 학부모의 참여가 많이 요구되는 듯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부의 대학으로 간 이후 소피와 나에게는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를 위해 뭔가를 준비해줄 필요가 없고, 특별히 가야 할 데도 없어졌다. 드라이브도 많이 다녀서 하와이의 곳곳이 머릿속에 이미 있었기 때문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줄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장 보러 가는 게 정기적인 나들이가 됐다. 코스코와 한국 슈퍼마켓이 정기적인 외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아이가 떠나고 나니 갑자기 생활패턴이 팍 늙은 듯한다. 전에는 립아이를 사서 데크에서 바비큐에 와인을 먹기도 했지만 그것도 요즘은 뜸해졌다. 물론 가끔 와이키키 비치 쪽 호텔에 맥주를 마시러 가기도 하고, 집 근처 수제 맥주집에 가기도 하고, 한식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기는 한다. 집에서 동쪽으로 30분 달려서 하와이 카이에 가기도 하고, 서쪽 끝 카에나 포인트에 가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만큼 익사이팅하지는 않다. 요즘은 매일 저녁 먹고 난 후 산책하는 것, 일요일 아침 마키키 하이킹 가는 것, 일주일에 한두 번 수영하는 것이 낙이다. 코로나 덕분에 읽고 싶었던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까운 세월이 이렇게 흘러간다.  


0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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