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고쳤다. 도대체 몇 시간을 이 자리에 차가 서있었을까? 4시간쯤 지난 것 같다. 날은 이미 깜깜해졌고 비는 계속해서 온다. 예약해둔 키츠부헬의 호텔까지는 2시간 이상 걸릴 것 같다. 소피는 그냥 이 근방에서 다시 호텔을 잡자고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갑자기 호텔을 아무 데나 잡는 것보다는 천천히라도 가는 게 나을 듯싶어서 그냥 가자고 했다. 길은 대부분 2차선인데 주변에 차들이 하나도 없다. 깜깜한데 비까지 오니 운전하기 상당히 어렵다. 중앙선 바닥에 표시된 형광물질이 차도의 중간이므로 그것에만 의지해 운전했다. 가끔씩 중앙선이 없어지고 좌회전이 나오면 내 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헷갈린다. 다행히도 그런 곳에는 1차선에 화살표 표지판이 항상 있어 그 바로 옆에 서면 된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도로 위의 빗물이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며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도로에 양들이 보이기도 하고, 사슴이 건너기도 한다. 빗물과 빛이 만들어내는 착시현상이다.
소피와 세라도 긴장하긴 마찬가지다. 한순간에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눈을 부릅뜨고 최대한 잘 보려고 하지만 가도 가도 도로는 끝이 없다. 소피와 세라가 어느 순간 "으앗~ "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뭔가 잘못됐나 싶어서 속도를 줄이고 핸들을 약간 틀었다. 나도 모르게 차선을 약간 벗어나 표지판을 들이받을 뻔한 것이다. 다행히 도로로 내려왔고 한숨을 돌렸다.
갑자기 표지판이 독일 국경임을 알린다. 오스트리에 내에서 움직이는 건데 왜 독일이 나올까? 네비가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걸까? 의심은 가지만 대책이 없다. 왔던 길을 돌아갈 수는 없다. 국경에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검사하자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길이라도 물어볼 텐데 사람 그림자도 없다. 이따금씩 반대편에서 승용차가 지나가긴 하지만 그 차들을 세울 수도 없다. 상향 등을 켜고 달리다 반대편에 차가 나타나면 끄고 지나가면 다시 켜고 그렇게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계속 운전했다. 조금 더 가니 또다시 국경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국경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아무튼 우리가 가는 곳은 오스트리아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무렵 드디어 키츠부헬 표지만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골프장을 끼고 있는 리조트다. 높지 않고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차를 세우고 프런트에 가니 젊은 남자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로비가 넓고 로비 한 곳에는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짐을 날라주는 포터도 아주 기분 좋은 미소로 맞아준다. 호텔방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큐리오 계열은 처음인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방 크기도 넓고, 발코니, 욕조, 소파가 다 마음에 든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차가 고장 나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렇게 안락한 방에 들어오니 그간 고생이 눈 녹듯 녹는다. 저녁 먹을 겨를도 없었기에 슈퍼에서 사 온 치즈, 샐러드, 과일 등 간단한 요깃거리와 와인을 마셨다. 이번 여행에서 랜트카 고장은 항공기 연착 사건 이후 최대의 위기다. 나중에 도대체 왜 중간에 독일에 넘어갔다 온 건지 지도를 보니까 이해가 갔다. 독일의 한쪽 끝부분이 오스트리아 쪽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곳을 지나온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을 둘러봤다. 수영장이 아주 큰데 실내와 실외가 연결되어 있다. 날이 추운지 실외 쪽 수영장에서는 김도 난다. 싸우나도 여러 개 있고 운동시설도 다양하다. 요가나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까지 있다. 호텔 뒤편으로는 산책길이 있다. 산책길로 올라가니 골프장이 보인다. 영상으로 보던 스위스 풍경과 같다. 하늘과 구름, 산과 잔디 가 만드는 풍경이 평화로움 그 자체다. 호텔 조식도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것들이 꽤 많다. 과일을 직접 갈아먹을 수도 있다. 빵과 치즈의 종류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세라가 좋아하는 스모크드 샐먼도 있다.
할슈타트 마을
오늘 일정은 오스트리아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는 할슈타트 (Hallstatt) 다. 2시간 좀 넘는 거리라 왕복시간만 5시간을 잡아야 하니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그래도 할슈타트에 가기 전에 호텔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젤 암 제 Zel am see)에 가보기로 했다. 젤 암 제는 호수인데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다. 생각보다 별로라고 생각했다. 하긴 여기는 많은 구경거리들이 대부분 호수다. 호수와 그 주변을 이루는 풍경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다. 호수 앞의 고풍스러운 호텔이 멋지다. 세라가 발이 아프다고 해 신발을 사려고 몇몇 상점을 기웃거리다 마땅한 걸 찾지 못하고 할슈타트로 향했다. 할슈타트도 이곳과 비슷할까?
가는 길은 꽤 멀었다. 거의 다가서는 언덕을 내려가는 길 쪽에는 짧은 터널이 있는데 그 앞에서 트래픽이 심하다. 벌써부터 돌아갈 길이 걱정이다. 어제처럼 깜깜하고 비가 오면 운전하기가 힘들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일찍 출발해 호텔에는 해지기 전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할슈타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간간이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유명세를 타서인지 선물점과 식당이 상당히 많았다. 단체로 다니는 관광객이 많았다.
나는 여기가 할슈타트인 줄로 알았다. 그림으로 본 할슈타트 풍경이 바로 여기와 같았다. 그런데 소피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여행 책자에서 그렇게 읽었다는 것이다. 할슈타드 끝쪽에 가니 배 타는 곳이 있었다. 여기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언제 나오나 생각이 들었지만 소피도 세라도 배를 타고 들어가자고 해서 표를 샀다. 잠시 후 사람들이 줄 서기 시작했다. 우리도 줄을 서있는데 갑자기 세라가 어디 갔다 오더니 잘못 알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할슈타트에 와있는 게 맞다는 것이다. 여행책자에서 읽은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는 사람들이 기차역에서 내린 후 배를 타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가 가는 것이다. 우리는 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미 호수를 우회해서 할슈타트에 와있는 것이다.
배표를 판 노인은 한 번 판 표는 환불이 안된다고 한다. 누군가를 주려해도 표를 사는 사람들이 없고 대부분 반대편에서 왕복으로 표를 사 가지고 와서 이미 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안 쓴 표는 아깝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배를 타고 건너갔으면 또 기다렸다가 다시 와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왔던 길을 걸어내려 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1시간 이상 머문 것 같지 않다. 직접 가서 보기는 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할슈타트는 사진으로 보는 전경이 더 멋진 것 같다. 물론 사진으로 보면 당장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막상 그 풍경으로 들어가 보면 그 풍경이 다 보이지가 않는다. 호텔로 돌아올 때도 어두워졌고 어제처럼 독일 국경을 넘어갔다가 왔다. 하지만 어제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호텔에 도착하니 수영장 문 닫을 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 세라는 이 멋진 수영장을 꼭 이용해봐야 한다며 저녁도 안 먹고 수영장으로 직행했다. 배가 고파서 뭔가를 픽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근처에 별로 갈만한 곳이 없다. 세라를 호텔에 내려주고 또 나가기도 그랬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비너 슈니첼(Wiener Schnitzel)을 한 번 맛보고 싶었는데 마침 호텔 룸서비스 메뉴에 있었다. 비너 슈니첼과 햄버거, 프라이를 시켰다. 어제 사둔 와인과 과일을 더하니 어느 고급식당에 못지않은 훌륭한 디너가 되었다. 마침 수영을 마친 세라가 와서 함박웃음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