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

어찌어찌 해결되는 것

by 욘킴

며칠 전, 편의점 가는 길에 전봇대 옆에 서 있는 주민자율게시판을 보았습니다. 집이나 건물을 처분한다는 내용이 조악하게 프린트된 A4 용지가 붙어있었습니다.


- ”방 3, 화 2, 마당, 주차 가능, 9천 “

방 세 개에 화장실이 두 개, 마당이 있고 주차까지 가능한 단독주택을 9천만 원에 급매로 처분한다는 내용이라던지,


- “방 2, 화 1, 채광 좋음, 도시가스, 7천 “ 도 있고,

- “OO역까지 10분“

- “1층, 2층 포함 몽땅 1억 2천” 도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에 어찌어찌 대출을 적당히 받으면 저 중에 하나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쳤습니다. “’ 도시가스‘는 뭘까? 가스 연결이 늦은 동네의 집 중 하나일 수도 있겠어. 분명 오래되고 수리할 곳이 많은 낡은 집이겠지. “


지도앱을 켜보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체크카드만 달랑 넣고 나온 카드지갑이 먼저 손에 닿았습니다. 집에 대한 생각은 곧바로 컵라면으로 할지, 봉지라면으로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재빨리 바뀌어 버렸습니다. 얼큰한 라면 국물을 떠올리니 괜히 조바심이 났습니다. 집보다는 우선 입이지, 편의점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라면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결국 봉지라면으로 선택하였습니다) TV로 뉴스를 봤습니다. AI가 앗아간 일자리와 쉬었음 청년에 대해, 서울의 부동산 매물이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 그중 전세 17억, 매매 40억이라는 어느 동네의 주상복합 아파트의 시세에 대해 전하는 기자의 발음은 또박또박했습니다만 어쩐지 머릿속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음,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돌아가고 있구나, 하며 끄덕이면서도 내 삶이 돌아가는 모양과는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퇴사를 결심하였을 때 짚어본 갖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각오가 된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일정한 수입이 없는 상태로 대략 몇 개월 정도를 버틸 수 있을지, 그동안 쌓아온 업무 경험을 이다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지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필사적으로 대비하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잘 해결해 왔기 때문에 크게 고심할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정작 마음을 심난하게 하는 것은, 그동안의 나는 ’ 1인분은 하는 상태‘의 톱니바퀴로써 거대한 세상 속 작은 자리에 끼워진 채 앞으로든 뒤로든 구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멈춘 상태라는 점이었습니다.


생산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점이 선사하는 해방감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합니다만, 내가 없이도 여전히 잘만 굴러가는 세상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입장이 되니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소외감이 밀려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감정이 정확하게 5:5는 아닙니다. 해방감이 8, 소외감이 2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씩씩하게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2를 잘 견뎌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 라면 수프와 면을 넣자마자 입맛이 도는 맛있는 냄새가 올라옵니다. 곧바로 기운이 납니다. 젓가락으로 집어든 면발을 후, 후, 불어 후루룩- 한 입 가득 넣고 우물거렸습니다. 뜨끈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밥솥에 남아 있는 식은 밥 한 덩이가 기억납니다. 잠깐이나마 심난했던 마음이 금세 평화로워집니다. 일단 오늘의 ‘먹고사는 일’ 중에 ‘먹는 일’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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