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헤어질 결심>
<은교> 걸고 넘어지기
* <은교>(2012) 스포일러
종종 흐르는 대로 적어나가다 보면 글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때가 있다. 배우의 연기에 대해 쓰려면 캐릭터와 서사에 대한 대략적 설명이 필요한데, 손가락 통제에 실패해 글이 새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번 박해일 글의 파트2는 도입부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게 됐다. 본문에도 적었듯 장해준의 경우 샅샅이 파헤치고 싶지 않아 분량 자체를 줄였기 때문에 이는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은교> 부분을 한참 정리하고 나니 이것은 박해일의 이적요에 대한 묘사인가 <은교>와 ‘은교’가 별로라는 토로인가 그 정체성을 알 수 없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두 문단을 대폭 잘라냈는데, 수정 전의 흐름을 기록해 놓고 싶어 그대로 옮겨왔다.
1.
[그 끝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짐승의 끝> 관람을 미루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노인으로, 게다가 시인으로 등장하는 작품 <은교>를 택했다. 원작자의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소설도 영화도 절대 볼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작품이었는데, 역시나 ‘은교’는 끔찍스럽게 꾸며낸 인물이었다. 그 자신에게마저 ‘나’가 아닌 삼인칭으로 불리는 한은교는 이 영화에서 딱히 인간이 아니다-그렇게 단정해 버리면 도리어 덜 불쾌하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복잡하고 꼬인, 상호 열등감에 휩싸여 늘 기이한 긴장이 맴도는 관계를 터트리기 위한 매개/상징/수단 같은 것. 그럼에도, 세 배우의 연기는 나름 몰입을 도왔다. 천연덕스럽게 무방비해지는 김고은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고, 열등감에 찌들어 스스로를 파괴하는 김무열의 표현법은 몹시도 탐이 났다. 박해일은… 이 작품의 치트키 같은 존재였다. 상상 속에서 박해일이 아닌 배우에게 이적요의 옷을 입히려 하면, 징그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2.
[“문학관은 나 죽거든 하시게. 근데 나 죽으려면 좀 오래 걸릴 거야.”, “저 사람들 아주 관뚜껑에다가 못질을 하려고.” 후자는 자신을 따라 나온 서지우에게 하는 말이다. 이적요에게 있어 그는 ‘최측근 제자’인가? 아니면 말을 거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찮은 중생인가. 서지우에게 있어 이적요는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일 뿐인가? 서지우를 보는 이적요의 얼굴엔 고집스러움과 무관심, 권위와 거리감이 주로 있었다. 시치미를 떼거나 벽을 치는 듯한 얼굴. 그러다가도 언뜻 안쓰러움이 섞인 복잡함이 묻어났다. 나는 자꾸 궁금했다. 이적요에게 서지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별이 다 같은 별이 아님’을 깨닫는 데에 십 년이 걸린 제자? 제 창작적 호기심을 실현할 수단? 정신없는 분노와 경멸, 상호 질투와 열등감으로 범벅 된 채 양쪽을 망가뜨리며 끝난 관계. 그래서,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닌’ 자인 은교를 제한 이적요와 서지우의-깔끔하게 떨어지는 표현으로 정리할 수 없는 관계에 집중해 각색했더라면 더 흥미로운 영화가 나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교>에 ‘생각보다’ 몰입했던 가장 큰 까닭은 2번 문단에 적은 이적요와 서지우의 미묘한 관계성이 흥미로워서였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삼각관계의 한가운데에 있는 자가 한은교보다 이적요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적요는 서지우를 질투했지만 한은교도 서지우도 서로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다. 초반엔 상대보다 자신이 이적요에게 더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하려 끊임없이 기싸움을 했다. 그들이 잠자리를 한 것도 사실 이적요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고….. 따져보자면 그렇다는 거다.
어쨌든 나는 <은교>를 아이디어부터 싫어한다. 21세기 픽션에서 성인과 청소년의 로맨스를 긍정하고 싶다면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제 1화자는 청소년일 것, 그리고 그는 작가/감독이 반영된 인물일 것.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리코리쉬 피자>, <스프링 블라썸> 속 연애를 범죄가 아닌 로맨스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전제조건이다. 그 법칙을 지키기는커녕- 열 일곱의(만 나이도 아닐텐데…) 여성을 일부 남성의 입맛대로 매우 이상하게 대상화한 <은교>, 이러한 이야기를 2010년에 세상에 내놓은 박범신과 그걸 또 ‘아름답게’ 영상화한 정지우를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헤어질 결심>의 신스틸러들
* <헤어질 결심>(2021) 스포일러
[절에서의 고풍스러운 데이트 시퀀스는 탕웨이와 박해일을 위해 특수하게 구성된 것만 같았으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분위기를 풍겼다.]고 글에 적었는데, 사실 서래와 해준만을 클로즈업하는 장면들은 대개 그랬다.
특수한 상황에서 인연을 맺은 서래와 해준의 만남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있다. 모든 것에 영향을 받음에도 이들의 로맨스는 잡다하게 걸리는 느낌 없이 우아하다. 영화는 각 시퀀스, 때로는 컷과 컷의 무게를 달리 조절해 이를 성공시킨다. 부부 사자대면 시퀀스에서 해준의 썰렁한 말장난과 임호신의 저질스런 농담이 깔리며 코미디 섞인 신경전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작품은 정안과 호신의 볼륨을 낮추고 블러처리해 서래와 해준만의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들은 눈짓으로 대화한다. 각자의 배우자를 옆에 두고 있음에도 이들에겐 지저분한 어페어의 긴장이 전혀 없다.
그건 정안과 해준의 장면들이 균형을 잡아 주어서이기도 하다. 정안이 “니가 죽였냐?”고 의심하는 부분마저- 은은하게 코믹하면서도 결코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지는 않는데에는, 이정현의 역할이 컸다. 남편이 의심스러워지자 자라와 석류를 들고 이혼한 이주임네로 가는, 이토록 깔끔한 ‘이과’ 여자 정안. (인사만 하고 빠지는 유태오는 또 왜 이리 얄밉게 매력적인가.) 어디서 본 듯 하면서도 그렇지만은 않은, 재치 있고 군더더기 없이 매 대사와 표정을 소화하는 이정현. 박해일은 그를 잘 받쳐주는 와중 한구석에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역할들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텐데, 전형적이면서도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제 옷을 입은 배우들의 만남은 굉장했다. 느릿느릿 귀여운 정영숙과 증거사진 속에서도 눈빛으로 말하는 정하담, 엉망진창이 돼선 간절하게 투덜대는 박정민. 싸보임과 속보임의 결정체인 박용우의 웃음소리는 또 어떠한가. 그리고 고경표의 수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능청을 따라갈 이 누가 있으리. 용의자를 패고 역차별을 토로하며 술에 취해 서래의 집 소파에서 잠드는 이 진상 밉상은 그를 만나 훌륭한 웃음거리가 됐다. 여성 형사들의 초상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먼저 ‘일하는 경찰’ 미지가 있다. 눈치 빠르고 칼 같이 선을 긋고 일은 잘 하며 불쾌를 숨기지 않는. 씬도 대사도 몇 없는데 짧은 표정과 눈빛, 효과음만으로 캐릭터가 파악되었다. 정이서는 딱 어울리는 온도로 씬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 다들 언급하는 김신영의 연수. 그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렸을 때 이후로 개그 프로그램을 거의 시청하지 않았기에, 김신영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코미디 퍼포먼스를 연수에 겹쳐 보지는 않았다. 그저 배우로 인식했을 때… 그가 연기함으로써 연수라는 인물이 살아났다는 점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공감했던 아티클을 스틸컷 아래에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