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전체
연희관 015B 10호-같은 토양에 꽂혀있는 무지개 깃발 (김뀨뀨)
5년 만에 맞이한 10번째 정기 호 발행은 가히 기념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일오비 10호에는 10호 특집으로 좌담회와 역대 베스트 글을 통해 공일오비를 돌아보는 코너가 실려 있다. 이 호에서는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부정하는 사람들과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 복수의 타자성을 지닌 퀴어 난민, 정상성 바깥에 위치한 우울증, 고려 사항 밖에 존재하는 몸과 소진의 감각 등이 등장한다. 모두 정상성 외부에 놓인 존재들이다. 특히 <같은 토양에 꽂혀있는 무지개 깃발>에서는 ‘퀴어 난민’이라는 복합적인 타자성・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이 법적 심사 절차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퀴어라 난민이 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드러난다. 이들은 난민으로 인정되기 전이나 후나 법의 테두리 외부에 놓일 가능성이 다분한 데다가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가둬놓기를 강요받는다. 어느 영역에서도 외부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희관 015B 11호-‘노량진수산시장’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사실 (응팡)
공일오비 11호에서는 목차와 카테고리가 더욱 다채로워졌다. 도시의 공간, 정체성, 비인간, 공간 점유와 박탈을 다룬 카테고리와 미성년과 이에 관한 영화 감상과 고찰이 담긴 카테고리, 그리고 이외에 우울, 양육, 여성, 상실 등의 주제를 포괄했다. <‘노량진수산시장’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사실>에서는 2019년 노량진수산시장 신시장 이전 문제로 강제 퇴거당하는 상인들의 저항과 투쟁을 포착한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상인의 권리와 국가 권력의 폭력 및 폭력 방조, 저항하는 사람들을 향한 혐오는 5년 후인 지금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법’을 명분으로 내세워 거리낌 없이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기시감을 부르지만, 어떤 면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연희관 015B 12호- 트라우마의 목소리 (노랑)
공일오비 12호가 세상에 나온 지 어언 3년이 지났지만, 그 사이에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릴 만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하지만 그 트라우마는 권력과 자본의 힘에 의해 왜곡되고 부정되어 왔다. 그런 면에서 역사책은 사람들의 기억을 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시공간의 축 위에서 사람들이 느낀 고통의 무게를 역사책이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노랑은 그렇게 체르노빌과 광주의 일을 써낸 두 권의 책을 끌어와 역사책이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그려낸다. 적나라한 서술이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할지언정, 외면해서는 안될 기억이자 사실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노랑의 글은 엄연히 ‘존재’한다.
연희관 015B 15호-퀴어, 무당, काली (만타)
내가 리뷰를 맡은 14호와 15호는 주옥같은 글들이 한가득한 알짜배기 호로, 보면 볼수록 너무 멋져서 후배 이로비인 나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글들이 가득 실려 있다. 이 알짜배기 호들엔 시의적으로 의의가 있는 글도 있고, 독특한 매력이 톡톡한 글도 있고, 흥미로운 공동 기획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이끄는 건 단연 편집위원 만타의 ‘퀴어, 무당, काली’였다. 12년 차 괴담오컬트미신덕후에 전통의 현대화를 사랑하는 나는 당연히 새로운 무당의 삶에 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글의 말미에 금기에 끌린다고 말할 때는, 금기 파는 상점의 창조자로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20 공동 기획 참조)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지향 무당인 홍칼리의 삶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모태신앙이었다가 스님이 될 뻔했다가 힌두교 신의 이름을 가진 무당이 된다. 그는 인도에 있다가 페루에 있다가 한국에 있다. 그는 마고 신이 되었다가 환웅이 되었다가 선녀가 된다. 고릿적부터 이어진 샤머니즘이 전통이 외려 소수자를 해방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꺼내는 탈출구가 되었다는 지점을 짚어내는 홍칼리. 그는 돼지머리가 없는 굿판 앞에서 소수자와 비인간을 위해 굿을 올린다. 혹시 종교가 있더라도, 미신을 믿지 않더라도 그런 마음은 내려놓고 홍칼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성이자 퀴어, 무당이자 모태신앙인 홍칼리의 교차하며 나아가는 ‘짬뽕’ 삶은 우리에게 새로운 ‘내림'을 줄 것이다.
덧. 홍칼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64ksana의 샤머니즘 테크노를 들어보는 것을 추천.
연희관 015B 16호 - 사랑하는 일은: (빙봉) / 무성애자인 내가 초-성애적 사회에 던져진 건에 대하여” (모자)
나는 16호로 처음 공일오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코로나 19가 한창이던 시기에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집에서 계속 온라인-대학생 생활을 지속하다, 2021년 하반기가 되어서야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갔다. 낯선 도시에서 친구도 별로 없었던 나는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무작정 도서관으로 향했고, 그렇게 한동안 도서관과 자취방을 오가다 중앙 도서관 1층에 놓여 있는 공일오비 16호를 발견했다. 16호는 시종일관 ‘종말’과 ‘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16호가 무엇보다 ‘사랑’을 바탕으로 신중히 ‘미래’를 그리고 있는 호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16호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글(들)을 꼽아보자면, 빙봉의 “사랑하는 일은: ”과 모자의 “무성애자인 내가 초-성애적 사회에 던져진 건에 대하여”가 있다. (하나만 꼽기 어려울 정도로 애정하는 호여서 어렵사리 두 편을 꼽았다. 꽥.)
빙봉은 하양지의 만화 <우리는 시간문제>와 최은영의 소설 <내게 무해한 사람> 속 단편 <모래로 지은 집>을 경유해 이상하고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랑하는 일은: ’ 뒤의 여백에 나름의 답을 채워넣는다. 사랑하는 일은 (상대에게) 기대는 것. 사랑하는 일은 손해를 발음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사랑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랑이라는 건 정말이지 모르겠다 …”라 말하며 글을 맺고 있긴 하지만, 글쎄. 나는 이 글이 일종의 선언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종말을 여러 차례 목격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사랑의 끝에서 다시 사랑을 빙봉이 다짐하고 있다고 독해했고, 그의 용감함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근데 또 가만 생각하다 보면 사랑이 별건가 싶다. ‘초-성애적 사회’에서 살아가며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라는 이야기를 반복해 들어 진절머리난, 그래서 (진짜)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이들에게 다시 이 말을 되돌려 주기 위해 쓰인 무성애자 당사자인 모자의 글을 보며 더더욱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나 다양하고 많은 수의 종-개체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구에서 사랑이 단일한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날리 없다. 이성 간 맺는 성애적인 관계만이 사랑이라면 … 그건 너무 재미없는 세상일테다.
연희관 015B 17호 - 조울과 조우하기: 아픔을 껴안을 수 있다면 (서로)
연세대학교 송도캠퍼스 자유관 한 구석에 놓여 있던 17호를 주워들어 읽었던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저마다의 빠르기와 색깔을 가진 글의 연쇄 속에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나의 진솔한 이야기에서부터, 세상을 이야기하는 묵직한 글까지. “나의 이야기를 자유로이 꺼낼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내가 연희관 015B에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우리는 과도한 자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빛과 소음은 24시간 멈추지 않고, 과도한 업무와 촉박한 일정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나의 마음을 온전히 지키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실제로 한국의 정신질환 평생 유병률은 약 25%에 달하는데, 이는 성인 네 명 중 한 명은 일생 중 한 번 이상 정신질환에 걸림을 의미한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고통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는 정신질환에 있어 너무 무심했다. 정신질환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이자 말해서도 안 되는 금기였다. 최근에야 여러 정신질환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나오고, 정신질환 또한 병원에서 치료 가능한 질병의 한 종류일 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지만, 여전히 아픈 마음을 언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이야기를, 그것도 가장 가까운 이의 아픔을 꺼냈다는 점에서 편집위원 서로의 글은 이미 충분한 가치를 품고 있다. 조울증(양극성 장애)를 가진 가족이, 그것을 수용하고 나아가는 과정은 담담하게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결과를 함의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준다. 서로의 글은 ‘바람직한 결론'을 의도하고 쓰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이 더욱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약, 산책, 대화, 눈맞춤'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일상'을 전제하고, 달라진 일상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의도하지 않았던 변화 그리고 아픈 마음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연희관 015B 18호 - 자각하는 감각의 기록 (띵동)
처음 이 글을 읽고, ‘턱’하고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쌓아 왔던 세상, 보았던 세상과 다른 것을 만났을 때의 생소함과 두려움이 중첩되어 나를 압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해당 글을 읽었음에도,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복잡한 감정들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한 감정을 자세히 파고드니, 나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입시와 학업’이라는,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비눗방울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 이동권을 향한 목소리와 그들을 향한 우리 사회의 냉소적인 시선에 대해 방관자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뉴스가 방영될 때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무비판적으로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띵동의 글은 나의 그 비눗방울을 톡, 하고 터뜨리는 날카로운 손톱이었다.
잘못이 없음에도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고, 타인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또 사회적인 안건에 대해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은 얼마나 비참한가. 주변인의 반응을 하나 하나 경계해야 했던 기억들, ‘아 그렇구나'라는 말로 애써 갈등을 회피해야 했던 경험들을 함께하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나라면 동일한 상황에서 띵동과 같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지, 그리고 어려움을 감내하고 나만의 사고를 정립해 나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요컨대 띵동의 글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담론의 방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정의 시선, 몰이해로부터 기인한 무의식적 입지 좁히기와 같은 작금의 방식으로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지속 가능한 담론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띵동의 글은, 바뀌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장애,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회적 현안에 대해 무심했던 이들-즉 나와 같은 존재-를 깊은 생각의 바다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 가능할 것이다. 아쉽지만 나는 아직 띵동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 글을 읽고, 분석하고,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연희관 015B 19호 – 시나브로 기계학습 (느루)
멋진 글들이 가득한 19호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들어오는 건 편집위원 느루의 “시나브로 기계학습”이다. 어릴 때만 해도 먼 미래의 일일 것만 같던 AI가 어느새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된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느루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에 대한 일반론적인 비판을 넘어, 해당 ‘신기술’들이 구체적으로 사회의 무엇을 은폐하는지, 또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지 날카롭게 짚어낸다. 이 글을 읽으면서 환한 첨단 기술의 등잔 아래서 사람들의 시야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 이야기들에 손을 뻗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