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자 지긍
사회적 불확실성의 여러 모습은 가장 은밀한 영역까지 침투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때에 내가 누구인지, 나의 중심이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발전시키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로 여겨졌던 규범이나 삶의 규칙이 쓸모 없어질 때,
삶 역시 홀로 감당해야 할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내가 실패하면 누가 나를 잡아줄까?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 『불안 사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앞에 불안한 마음이 나날이 커진다.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소리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생각이 계속 끼어든다. 졸업을 하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건지, 무얼 해야 하는 건지 재차 물었다.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을 해치우고 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의 공백이 생겼다. 그럴 때면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작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열심히 화면을 쓸어내리는 내 손가락에 어느 순간 오돌토돌한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서 긁다 보면 수포가 터지고 주변에 또 수포가 올라왔다. 상당히 성가신 증상이었다. 수포가 손등으로 옮겨가면서 성가신 정도를 넘어섰다. 수포가 생기는 주기가 짧아지고, 수포끼리 합쳐지면서 손등 대부분이 피부염으로 뒤덮였다. 피부과에 가서 원인 모를 피부염을 진단받고 약을 타왔다.
나는 피부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한 삶’이라는 실체 없는 목표를 세웠다. 이미 하고 있던 운동에 근력운동을 더했다.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며 영양제와 약을 챙겨 먹었다. 피부염은 차차 가라앉았다. 독한 약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일단 증상을 멈추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완치란 없다는 의사의 불길한 예언은 사실이었다. 간지러워서 살펴보면 지긋지긋한 수포가 뽀록 올라와 있었다. 작은 수포만 발견해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구 번지진 않을까 유심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수포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자를 치는 손에 수포들이 보인다. 얘들아, 너네는 언제 들어갈 거니? 수포야 대답이 없으니 친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내 친구들도 어딘가 한 군데씩 아프다. 혹은 덜 아프기 위해 무언가 실천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너무 들어서 그런 것일까.
2017년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윤소하 의원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의료 통계정보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윤의원은 근골격계 질환·소화계 질환·비뇨생식계질환·정신건강 관련 질환을 겪는 환자 증가율이 노년층 다음으로 20대가 가장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생각보다 20대는 많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고, 굳어버린 어깨에 긴장성 두통을 겪을 수도 있다. 소화가 잘되지 않다가 위염으로 악화되거나 감기처럼 오는 질염으로 병원에 내원할까 고민하기도 한다. 우울함에 침대를 벗어나기 힘든 날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통상적으로 질병은 노년의 것으로 치부된다. 노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나, 주로 65세를 노년층의 시작점으로 본다. 노년층에 이르면 노화 과정을 거친 신체는 질병에 취약해질 수 있다. 노년의 질병과 아픔은 그 고통과 별개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다르게 청년기의 질병과 아픔은 ‘불운한 일'과 같이 예외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윤 의원이 20대 청년의 유병률을 언급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2018년까지 2,30대 청년은 국가건강검진 대상이 아니었다. 2019년부터 홀수년에는 홀수 년생이, 짝수년에는 짝수 년생이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건강검진을 받는 비율은 20%가량으로 다른 세대에 비해 현저히 낮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년의 건강은 공식적으로 국가 관리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사회적 통념과 정책의 미비 사이에서 청년의 질병과 아픔은 오롯이 스스로 해결할 문제가 되어버린다.
질병과 아픔은 완전히 동치되는 단어가 아니다. 어떤 아픔은 질병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고, 어떤 질병은 아픔을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병원에 가거나 건강검진을 받는 비율이 비교적 낮은 20대의 경우 아픔을 겪더라도 질병으로 진단받지 못하거나 스스로 질병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아프지 않고, 질병도 없는 상태라고 해도 자신이 건강하다고 인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포괄적인 의미의 질병과 아픔에서 벗어나 건강해지는 일에 끝이란 없다. 아프지 않은 것을 넘어서 피곤함마저 느끼지 않는 건강을 향해 무한히 달려야 한다. 각자 설정한 건강을 달성하는 일은 여러 형태로 수행할 수 있다. 가령 진찰을 받고 약을 먹는 것뿐 아니라 주관적인 건강 상태를 증진시키는 것도 포함한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친구들이 많다. 이들은 집에서 영상을 보며 운동하거나, 전문가에게 강습을 받기도 한다. 자신의 건강 상태를 기민하게 확인하고 근육량을 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는 국가 통계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국민생활체육조사에서 한 달에 1회 이상 운동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전 연령에 걸쳐 늘고 있다. 특히 20대 응답률은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한편, 같은 설문조사에서 전 연령대 모두 건강 관리를 운동을 하는 이유로 꼽았다. 운동은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꼽힌다.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확대되고, 건강을 위해 운동할 필요성이 늘어나는 것은 세대와 관계없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대가 병을 진단받는 비율이 늘고 있고 다른 세대에 비해 빠르게 운동 인구가 증가한 사실은 눈여겨볼만하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든 건강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는 20대가 많아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코로나 시기와 맞물리면서 영양제를 구매하는 청년세대도 부쩍 늘고 있다. 늦기 전에 영양제를 챙겨 먹으라는 ‘인생 선배’의 조언은 우스갯소리처럼 떠돌지만 실질적인 효력을 미쳐 영양제를 먹도록 유도한다. 자발적으로 운동을 하고 영양제를 챙겨 먹는 세태 이면에는 건강관리를 점차 자기 개발의 일종으로 인식하는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2] 자기 개발의 의미는 단순히 능력을 개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개발을 수행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까지 포함한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지는 동시에 건강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건강이 나날이 주요한 화두로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건강 유지 및 증진’이 이루어진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상태? 하루 종일 할 일을 마치고도 힘이 남아 운동을 할 수 있는 상태? 그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이처럼 일률적이지 않은 건강의 기준을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건강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수많은 항목을 지키기 위해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추가로 영양제를 챙겨 먹으면 과연 우리는 질병에서 벗어나 건강한 상태에 머물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피부염에 시달리면서 갖은 방법을 써봤지만, 말짱 도루묵이 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운동도 하고 약도 복용하면서 피부에 좋다는 영양제도 챙겨 먹었다. 심지어 심신 안정을 위한 명상까지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수포는 내 모든 노력을 비웃듯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에 손을 살폈을 때 못 보던 수포가 보이면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내 몸을 내가 통제하지 못해서 오는 충격은, 반대로 개인이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화가 내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물어야 한다. 과연 건강은 개인의 몫인가?
질병의 원인으로 개인적 요인뿐 아니라 사회적 요인이 있음을 밝히는 학문이 있다. 바로 사회역학(epidemiology)이다. 사회역학의 기반을 닦은 연구자 중 한 명인 리사 F. 버크먼은 저서 <사회역학>에서 그 사회역학의 정의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는 사회 역학을 건강의 사회적 분포와 사회적 결정요인들에 대해 연구하는 역학의 한 분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우리가 광범위한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관련된 사회환경의 규명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3]
한 마을에 대한 이야기로 사회역학을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다.[4]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위치한 로세토 마을의 의사들은 마을 주민의 심장병 사망률이 주변 마을에 비해 유독 낮음을 알게 된다. 심장병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다른 요인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다른 마을과 비교했을 때 발병 비율이 상당히 낮았다. 아무리 연구를 진행해도 기존에 알려진 발병 요인으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연구자들은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고 밝히면서도 마을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사회적 환경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탈리아 이민자가 모여있던 로세토 마을은 종교 지도자인 니스코 신부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니스코 신부는 주민들 간 서로 돕고 보살피는 문화를 조성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저임금으로 인한 파업에 함께했으며,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각종 공동체 활동을 주도했다. 연구자들은 로세토 마을의 친밀한 공동체 문화가 심장병 사망률 감소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고, 이는 학계에 엄청난 논란을 가져왔다. 해당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들은 이후 30년 동안 로세토 마을을 관찰한다. 긴 시간에 걸쳐 수집된 데이터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세토 마을의 공동체 문화는 사라졌고 심장병 사망률은 다른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돌아왔다.
일반적으로 심장병 발병 원인을 찾기 위해 환자의 개인적 요인을 살핀다. 흡연, 음주, 비만같이 개인의 생활 습관과 체질에서 발병 요인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로세토 마을 사례가 보여주듯 개인적 요인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역학은 사회적 요인에 주목한다. 사회역학에서 제시하는 대표적인 요인으로 사회경제적 지위, 차별, 소득불평등, 실업과 퇴직, 사회네트워크, 사회자본 등이 있다.[5] 톨스토이의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여기서도 쓰일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건강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건강하지 않다.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 알려진 사회적 요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도 있고, 어떤 요인들은 쉬이 중첩되기도 한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 환경에 노출된 개인은 저마다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대 인구 집단이 처한 현실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나이를 기준으로 한 집단으로 묶는 방식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동질적일 수 없는 집단을 하나로 호명할 때 개별의 삶은 쉽게 무시당한다. 여러 이유로 쉬이 불려 나오는 20대는 그 목적에 따라 균일한 집단으로 그려진다. 20대 앞에 붙는 여러 꼬리표 사이에서 청년의 어려움은 거스를 수 없는 취업시장의 변화 정도로 갈음된다. 그러나 ‘취업난’ 세 글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20대의 현실은 조금 더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다. 지독한 피부염을 앓고 주변 친구들을 돌아볼 때 세상이 붙여준 꼬리표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의 아픔과 친구들의 아픔을 사회역학으로 진단해 새로운 이름으로 세대를 엮어내는 일이 필요했다.
20대 인구 집단 대부분은 ‘취업’의 갈림길 앞을 지나간다. 취업을 중심으로 사회적 요인을 짚어 나간다면 20대가 겪을 환경을 유추할 수 있다. 2021년 7월 기준 만 20세에서 29세 인구는 약 640만 명이다. 이 중 실업자는 약 29만 명으로 실업률은 7.1%다. 실업률은 경제 활동 인구 중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하지만 이런 기준에서 구직단념자나 구직활동과 함께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제외된다. 이런 한계를 보안하기 위해 ‘시간 관련 추가취업가능자’와 ‘잠재경제활동인구’를 포함해 계산하는 청년 확장 실업률을 지표로 사용하기도 한다. 2020년 이후 청년 확장 실업률은 25%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다.[6] 15세에서 29세 사이 청년 네 명 중 한 명은 먹고 살 길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의 일차적 원인은 ‘취업이 되지 않는 상태’인 실업이다. 실업상태에서 겪는 어려움을 노동시장 진입의 배제, 사회적 고립, 경제적 배제를 포함하는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로 설명할 수 있다.[7] 장기간 실업상태에 놓여있을 때 사회적 배제는 더욱 심화되며, 실업상태가 길어질수록 취업 이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진다.[8] 또한 실업은 대인관계에서의 고립으로 이어진다. 취업 준비생을 대상으로 한 여러 설문조사에서 장기간의 취업 준비 과정에서 인간관계 단절을 겪었다고 응답하는 경우가 많았다.[9] 취업 준비에 집중하기를 요구 받는 청년이 대인관계에 시간, 돈, 감정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청년이 처한 취업난은 단순히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음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실업 상태는 사회역학이 제시하는 요인 전반에 영향을 미쳐 개인의 건강에 위협을 끼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년을 대상으로 한 정책 대부분은 취업률을 높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은 공공기관의 청년 고용 확대와 직장 체험 기회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혹은 지역화폐로 일정 금액을 청년에게 지급하거나, 면접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도 있다. 이러한 정책이 필요함은 부정할 수 없으나 취업률 증대가 만능 해결책인지, 다른 접근이 필요하진 않은지 질문해야 한다.
이미 불안정한 취업의 문턱 앞에서 코로나까지 찾아왔다. 고립은 더욱 쉽고 깊어지며, 불안은 나날이 커진다. 제 갈 길을 어떻게든 찾는 일은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매년 커져가는 고시생 규모는 먹고 살 길을 찾고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오랜 시간 혼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 이들에게 건강마저 ‘자기 개발’의 무엇으로 얹을 수 있을까. 요즘 청년들은 비실비실하고 혈기가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 이전에 알아서 건강을 챙기고 아픔을 통제하고 질병을 피하려는게 맞는걸까? 개인에게 건강의 책임을 묻기에 지금 상황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내가 형체를 잡아낼 수 없는 불안함과 함께 누워있는 동안 어떤 친구들은 길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오랜 친구는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몇 달째 못 본다며 우는소리를 해야 했다. 생일마저 가까이 챙길 수 없었고, 나는 한발 늦은 생일 축하 편지를 썼다. 목적을 잊고 불안한 속내를 토로하다가 문득 이 관계는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있었구나 하고 안도감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이 관계가 소중한 까닭은 세상의 많은 것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장을 요구하고 변화를 장려하는 세상 속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친구와 나의 관계는 나름의 안식처였다. 변하는 것들이 있기에 변하지 않는 게 소중하다는, 그러니 이 세상을 조금은 사랑해보자는 그럴듯한 말을 적어 내리고 편지를 끝맺었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문장이 단순한 체념과 순응이 되지 않으려면, 세계를 직시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내야 했다. 나를 불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이곳에서 잠깐의 낙관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친구와의 관계였다. 사회역학이 나를 사로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인간관계는 단순히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잘 형성된 사회적 관계는 사람들이 덜 아플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된다.
백수들의 회사 니트컴퍼니를 소개하고자 한다. 백수들의 회사라니 모순적이지만, 니트컴퍼니는 청년 실업자들이 모여서 만든 가상의 회사다.[10] 그들은 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각자 취업 준비를 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함께 모여서 니트컴퍼니 내에서 맡은 직책이 적힌 명함을 만들기도 한다. 인터뷰에서 니트컴퍼니의 일원들은 실업 상태는 동일하지만, 몸도 마음도 상태가 나아졌다고 말한다.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긴 어렵다. 당장 니트컴퍼니만 해도 아름다운재단의 지원 아래 월 50만 원의 임대료를 내고 공간을 사용할 수 있었다.[11]
사회적 네트워크는 다른 요인들에 비해 개인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국가 정책, 복지의 영역에서 사회적 네트워크는 으레 뒷전으로 밀려난다. 니트컴퍼니도 개인의 시도를 넘어서 아름다운 재단의 정책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과 수단을 제공하는 일은 네트워크 형성에 분명 도움이 된다.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사회적 네트워크의 형성조차 자기 개발의 영역으로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마치 스펙을 만들 듯이 인맥을 넓혀가고 사회적 명성을 높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관계를 통해 우리는 사회적 지지를 얻고, 그 집단을 통해 규범을 배우며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한 사회참여를 할 수 있고 사람과 접촉할 수 있다. 관계는 실질적인 취업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고, 보건 의료나 주거 접근성을 높이기도 한다.[12] 동시에 사회적 요인들은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가령 지속적인 차별에 노출되거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환경에 놓여있다면 사회적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차별이 야기하는 소외, 관계 형성이 유발하는 비용은 개인이 사회적 네트워크를 포기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교류를 할 수 있는 사회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책적 뒷받침과 변혁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이다. 계속해서 더 나은 사회를 꿈꿀 때 진정으로 각자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은 자꾸 아픔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픈 탓이 불안한 세상에도 있다면 자꾸만 자신을 탓하며 더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걸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이 건강할 수 있는 세상을 요구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기여하는 일이 필요하다. 관계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 부차적인 것, 나중에 만들어도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 머무는 이들은 더 쉽게 아프다. 그렇기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보이는 관계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좋은 사람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 주변 사람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피부염에서 벗어나고 뻐근한 목 통증이 가셨으면 좋겠다. 어쩌면 단순할지도 모를 나의 바람을 달성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일 때도 많다. 그러나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내가 씩씩히 걸어가는 것도 분명 중요하겠지만, 나를 넘어지게 만드는 것들을 치워나가는 일도 필요하다. 단순히 내가 덜 아플 수 있는 조건을 달성하고 싶진 않다. 내가 사회 경제적 지위를 챙기고 튼튼한 네트워크를 만든다면, 덜 아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아플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나 혼자 아프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있다. 친구에게 썼던 편지 마지막 문단에 덧붙일 말을 찾았다. 지금 세상은 조금만 사랑하고,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을 사랑해보자고. 그곳에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고 건강할 수 있길 바란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너와 나의 불안과 우리의 아픔을 덜어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뒤늦게 고쳐 적은 편지를 보내본다.
[1]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 『불안 사회』, 이덕임, 책세상, 2019, 10쪽.
[2] ““몸 관리도 자기개발”...자기개발로 건강 챙기는 MZ세대”, <이데일리>, 2021년 3월 27일.
[3] 리사 F. 버크먼, 『사회 역학』, 신영전, 한울아카데미, 2003, 38쪽.
[4]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 인287-296쪽.
[5] 각 요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리사 F. 버크먼,의 『사회 역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취업자 60만명 육박에도 '거품' 우려…실업자 3명중 1명 '청년'”, <뉴데일리 경제>, 2021년 7월 14일.
[7] 신희천, 장재윤, 이지영, 「 대학졸업 청년실업과 정신건강의 관계-자기회귀 교차지연 모형의 적용」,『 사회연구』제16호, 2008, 45쪽.
[8] 이수영. 「첫 일자리로의 이행기간이 청년 건강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 2019, 2쪽.
[9] “취준생 5명중 2명, ‘아웃사이더’라 느껴”, <스페셜 경제>, 2019년 8월 19일.
[10] “백수들은 정말 돈도 안 벌고 집에만 은둔하는 사람들일까?”, 유튜브 채널 <씨리얼>, 2020년 9월 15일.[11] “우리는 회사에 출근하는 백수다”, <시사인>, 2020년 10월 24일.
[12] 리사 F. 버크먼, 『사회 역학』, 신영전, 한울아카데미, 2003, 제7장 사회통합, 사회네트워크, 사회적 지지와 건강, 183-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