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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Oct 11. 2021

<129호> [동물] 비둘기와 함께 목욕을

편집위원 유자

초록색 배경 위에 '비둘기와 함께 목욕을'이란 글자가 적혀있다. 글자 위아래로 비둘기 두마리가 날고 있다. 아래쪽에는 비둘기 두마리가 목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섯 마리의 비둘기가 물가에서 몸을 씻고 있다.


가끔 동네에 있는 천을 걷다 보면 삼삼오오 모여 물에서 목욕하는 비둘기 떼를 본다. 물속에서 몸을 씻고 깃털을 말리는 비둘기를 보는 일은 새삼스럽다. 25년 가까이 살면서 비둘기가 몸을 씻는 모습은 천이 흐르는 동네로 이사 오기 전까지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비둘기는 어쩐지 더럽고 불결한, 비위생적인 존재였다. 비둘기가 퍼덕거리며 내 주변을 날아갈 때면 진드기와 세균이 떨어지는 것 같아 몸을 움츠리곤 했다.


한국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집비둘기의 원종은 바위 비둘기(Rock dove)로 원래 해안가 절벽이나 물이 많은 산 속 바위 근처에서 서식하였다. 이러한 습성으로 인해 도시 속 비둘기 또한 높은 빌딩과 다리에 둥지를 틀고 살아간다. 그러나 도시 생태계는 비둘기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도시에 어지러이 널린 전선과 쓰레기는 비둘기의 발과 다리에 상처를 내거나 절단시킨다. 비둘기는 부리로 닿지 않는 깃털을 발을 이용해 정리하기 때문에, 발이 절단된 비둘기는 깃털을 손질하지 못한다. 몸을 씻을 만한 깨끗한 물과 모래가 없는 도시의 위생 상태는 깃털 관리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깃털을 관리하지 못한 비둘기는 보온과 방수뿐만 아니라 비행에도 어려움을 겪는다.[1]


도시의 소음과 공해는 비둘기의 귀와 눈을 멀게 한다. 시력과 청력을 잃은 비둘기는 사람이나 자동차가 가까이 와도 피하지 못한다. 인간이 준 먹이나 토사물 등을 먹고 몸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기도 한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뚱뚱한 비둘기를 향한 ‘닭둘기’라는 멸칭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해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비둘기를 ‘날개 달린 쥐(rat with wings)’ 혹은 ‘날아다니는 쥐(flying rat)’라고 부르곤 한다. 더럽고 불결한데 날개까지 달려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불결함의 대명사인 비둘기는 동시에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올리브 가지를 물고 돌아오는 흰비둘기의 이미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부터 피카소가 그린 세계평화회의 포스터까지 꾸준히 등장한다. 비둘기는 자연과 평화의 상징으로서 각종 국가 이벤트에 동원되었다. 한국에서 1985년부터 2000년 사이 비둘기를 방사한 행사는 90여 회에 달한다. 국가는 비둘기를 무리 없이 동원할 수 있도록 학교에 비둘기 사육 시간을 마련하거나 도심 속 비둘기 집 지어주기 운동을 진행하는 등 비둘기 개체 수 증가를 위한 여러 방식을 도입했다. 이때 언론이 묘사하는 비둘기의 이미지는 ‘자연에 대한 낭만과 사랑’, ‘가족의 화목’에 가까웠다.[2]


그러나 무분별한 비둘기 사육과 방생으로 인해 비둘기의 개체 수가 급증하며 배설물과 깃털 등이 도심 속에 눈에 띄게 증가하고, 이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심지어는 독이 묻힌 모이를 주어 비둘기를 집단 살해하는 사건이 도시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비둘기가 대표하는 상징은 ‘자연’에서 ‘오염’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결국 환경부는 2009년 집비둘기를 ‘유해 동물’로 지정하였다. 한때 국가 이벤트를 위한 동원의 대상이었던 비둘기는 국가에 의해 퇴치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사회학자 콜린 저롤맥은 1851년부터 2006년까지의 뉴욕타임즈 기사와 1980년부터 2006년까지의 신문에 사용된 표현을 통해 비둘기가 문제시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비둘기는 실제로 지저분하기보단 대도시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더럽다’고 여겨졌다.[3] 즉, 현대 도시 공간이 구성되는 방식과 도심 속 비둘기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돌한다. 도시 바깥에 있는 사슴이나 산새는 “자연과 문화의 국경지대”에 놓인다.[4] 그러나 비둘기는 도시의 상징인 빌딩과 공공장소 한가운데에 등장한다. 쥐나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지도 않고 한낮에 광장을 활보한다. 결국 도심 속의 가시성이 비둘기를 불결한 존재로 만들었다.


비둘기가 깨끗한 물만 있다면 하루에도 서너 번씩 물 목욕을 즐기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사람이 사는 환풍구의 좁은 틈에 굳이 둥지를 트는 것이 절벽 틈새에 살던 습성에서 기인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청력이나 시각을 잃은 개체가 많아 사람이나 사물을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


올리브 가지를 물고 날아가는 흰 비둘기와 퀭하고 뚱뚱한 몸으로 도시를 활보하는 ‘닭둘기’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상징 속에 갇혔다. 고리타분하고 낡은 이분법에 쌓였다. 사람이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한 해석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 나는 비둘기가 목욕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여러 번 확인하고 나서야 비둘기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비둘기는 그저 비둘기였다. 비둘기는 그저 새였다. 생명이었다.





[1] "Footless Urban Pigeons Suffer Untold Trials and Tribulations", <Scientific American>, 2014.09.10.

[2] 김준수, "한국의 발전주의 도시화와 '국가-자연' 관계의 재조정", 공간과사회 제28권 1호, 55~100쪽, 2018.

[3] Colin Jerolmack, “How pigeons became rats: The cultural-spatial logic of problem animals”, in Social Problems, vol. 55 (2), 72-94, 2008.

[4] "Rats with wings", <EUROZINE>, 2013.08.30.





편집위원 유자

zyouz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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