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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Nov 20. 2021

정직해도 너무 정직한 헬싱키의 미용사

나라를 몇 번 옮겨 가며 살다 보니 낯선 환경에서 겪는 불편함은 몸에 배어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나라에 갈 때면 여전히 숙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나의 새 카맣고 두꺼운 머리카락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미용실을 찾는 것.


아니, 능수능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동안 워낙 별의별 실패들을 다 겪으며 기대치도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기대치가 높았던 것도 아니다. 커트를 할 때에는 끝이 뭉뚝하지 않게 조금 층을 질 것, 검게 자란 뿌리 염색을 할 때에는 이 전에 염색한 자연 갈색 머리카락과 '어느 정도라도' 톤을 맞출 것, 이게 내 조건의 전부다. 커팅은 숯 치는 걸 포기하고 풍성한 머리 그대로 끝 만 다듬으니 실패 확률이 많이 줄었는데, 염색이 문제다. 동양인의 타고난 검은 머리, 거기에 철사처럼 두꺼운 머리카락이 난이도를 높여 놓으니 미용사들이 쩔쩔매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가는데, 맘에 안 드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태도다.


"이번 염색하기 전부터 당신 머리 색상 톤이 이미 일곱 가지는 되었어요, 이 머리 색상을 맞출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두바이에이탈리아 여자 미용사가 새로 난 머리뿐 아니라 머리 전체에 염색약을 얼룩덜룩 묻혀 얼룩송아지로 만들어 놓고 한 말이다.


"색이 아주 잘 나왔어요. 밖에 나가 햇빛에 대고 보면 더 밝아 보일 거예요."

파리의 한 남자 미용사는 머리 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검정 그대로인데, 계속 갈색이 맞다고 우겨댔다.


"당신이 자꾸 고개를 옆으로 기우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숯 많은 머리, 커팅하기 힘든 알죠?

 머리카락 좌우 길이를 안 맞게 잘라 놓고, 손님의 머리숱을 탓하는 형편없는 미용사도 만나봤다.


"이 정도 어두운 색의 머리는 염색 전에 블리칭을 한 번 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머릿결이 상할 건 예상해야 하죠. 블리칭 없이 당신 머리는 색 못해요."

파리의 중심부에 염색 전문 미용실에 찾아가니, 그동안 답답했던 궁금증이 조금은 풀리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금발머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블리칭이 왜 필요하냐고 물으니, 프랑스에서 허용하는 산화제 농도는 아시아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낮아 짙은 색의 머리는 염색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매번 상황들이 이러하, 현지 미용실을 찾으려는 노력 끝에 결국 향하는 곳은 플랜 B, 바로 한인 미용실이다. 간혹 현지 미용실보다 비쌀 때도 있고, 집에서 천리 길일 때도 있지만 실패율은 현저히 낮다.



그런데 한국인이 별로 살지 않는 핀란드 헬싱키에 오게 되었, 어쩔 수 없이 다시 미용실 유목민 생활을 시작하려던 차였다.  구글 검색을 해서 (현지인들의) 평점이 좋은 곳들을 추려내고 그중 (현지인) 지인이 앞머리를 잘랐는데 꽤 만족스러웠다는 미용실에 찾아갔다. 내 머리를 몇 초간 살펴보던 미용사는 <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자신감을 내비치더니 일주일 후로 예약을 잡아줬다.


짧은 단발머리, 또렷한 눈매, 핀란드 여성들의 평균보다 키는 많이 작지만 당차 보이는 미용사는 내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는 동안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동양인 머리는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지금까지 일본 손님 두 명 정도?"


"핀란드인 손님들은 주로 커팅을 하러 오는 게 다예요"


"핀란드에서는 염색이 예전만큼 트렌드는 아니에요."


미국인들과는 반대로 스몰토크(낯선이 와 어색함을 깨기 위한 가벼운 대화) 어려워 하는  핀란드인들 특성을 알기에 그녀와의 대화는 핀란드에서의 미용실 첫 경험만큼이나 새로웠다. 평소 밝은 사람의 말투나 톤은 아니었는데, 이 외국인 손님과의 어색함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기미가 보였다. 반면에 옆의 미용사는 커팅을 하는 손님과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예상보다 내 머리숱이 더 많았는지 미용사는 염색약을 두 번이나 더 만들어 왔다. 이런 경우 비용을 처음 말했던 것보다 더 비싸게 받는 미용실도 더러 있었다.


염색을 마치고 드디어 머리를 감는 시간. 혹여나 색이 잘 안 나오더라도 표정관리를 잘해 그녀와 어색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로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금발머리가 대부분인 핀란드에서 새카맣고 두꺼운 검은 머리를 능숙하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에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머리를 감기던 미용사는 고해성사하듯 심경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쩌죠,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는데요"


샴푸 거품을 더 씻어 내고는,


"염색이 잘 안 나온 것 같아요"


그녀에게 머리를 맡긴 채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데, 그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내가 그녀를 위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솔직한 미용사는 본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그녀만큼 나도 당황스러웠다.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머릿 속을 샅샅이 들여다보며  드라이를 하던 그녀는 머리가 다 마르기도 전에 내게 물었다.


"혹시 지금 시간 있으세요? 염색을 다시 했으면 하는데. 물론, 비용은 추가하지 않고요"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시간 개념에 칼 같고, 인건비가 세서 인력이 들어갔다 하면 뭐든지 비싸지는 핀란드에서 예상할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 미용실 닫을 시간이 아니냐고 물으니, 내 머리를 완전히 마치면 닫겠단다.

이렇게 순순히 실수를 인정하는 미용사는 한국에서도, 어디에서도 없었다. 염색을 다시 해달라는 말을 하더래도 내가 해야 했고, 그러면 돈을 더 내라고 하는 게 미용사들의 반응이었다.

이렇게 솔직한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예상치도 못한 수고까지 자청하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졌다. 이런 고난도의 머리를 들이밀어 가지고.



결국 그녀의 의지로 두 번째 염색을 하고,

머리를 감기던 그녀가 말했다.


"아까보다는 괜찮은데, 그래도 좀 어두워요"


결과가 어떻든 난 무조건 괜찮다고 할 생각이었다. 

드라이로 말리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았는데, 그녀의 우려 섞인 말과 달리 실제로 꽤 만족스러웠다. 톤이 완벽하게 잘 맞는 건 아니었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워 봤을 때 이 정도면 훌륭함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주 마음에 든다며 진심을 담아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미용 경험이 많지만, 다양한 머리를 해 볼 기회는 많지 않았는데 제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이제 조금 알았으니 다음번에 오시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기억에 한국에서는 미용실에 가면, '머리 어디서 했어요'라고 물으며 알지도 못하는 나의 이전 미용사 실력을 먼저 헐뜯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라를 막론하고는 경력과는 무관하게 자신을 실력 있는 미용사라고 믿게끔 머리를 하는 동안 온갖 지식들을 귀에 읊어대고, 결과물 앞에서는 내 만족도가 어떻든 당당한 눈 빛으로 이게 최선이라는 식의 말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내가 만난 만난 부류와는 다른 '첫'미용사였다.


계산대로 간 그녀는 내 손님 정보란에 이 날 사용한 염색약에 관한 정보를 메모해 두는 듯했다.


"가격을 다 받을 수는 없고, 10% 할인해 드릴게요"


이 미용사는 이 날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손사래를 치며  내가 할인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밤 열 한시가 거의 다 된 시간이었다. 헬싱키에  이 시간까지 문을 여는 미용실은 없다.  핀란드의 법대로 라면 그녀는 근무 오버타임에 야간수당까지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그녀는 카드기기에 이미 할인된 가격을 입력하여 내 카드에서 딱 그만큼만 계산되도록 했다.

고마움과 미안함, 이보다 더 큰 이 사람의 프로 정신 감동을 느끼며 미용실을 나왔다.


미용사 뿐 아니라 어떤 직업이든 배움의 과정은 끝이 없다. 이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남들 앞에서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에 그녀가 더 훌륭해 보였다.


그녀는 내 마음속에 인생 미용사로 자리 잡았고 그 이후로도 몇 번 그녀를 찾아가 머리를 했다. 예약을 하면 짧을 땐 2주, 더 기다려야 하는 때 도 있었다. 알고 보니 인기가 아주 좋은 미용사였다. 여름휴가기간엔 그녀의 휴가를 앞두고 손님이 꽉 차 한 달 뒤에 보자는 말도 들었다. 그 인기가 너무나도 당연해서 나는 무조건 기다린다.


까페라떼 맛집이기도 한 미용실.




Daum <여행맛집> 에 소개되어 1만 뷰 이상 조회되었습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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