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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Oct 18. 2021

베테랑- 핀란드의 할머니 승무원

승무원으로 정년퇴직 가능할까?

승무원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이트한 치마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젊은 여성을 떠올린다. 이는 승무원직에 종사하고 있는 나부터도 그랬다 (나보다 조금 더 어린 여성을 떠올리곤 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우리 회사에서 뿐 아니라 공항과 호텔을 오가며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 남/녀 승무원들을 자주 보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어떻게 아직도 이 일을 하지'하는 생각이 한 켠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들의 모습에 나를 투영시켜 보곤 했다.



중동 항공사.

내가 처음으로 승무원 일을 시작한 아랍 에미레이트 항공은 젊은 혈기로 가득했다. 입사했을 때 이십 대 후반이었던 나는 우리 팀 스무 명중 나이가 세 번째로 많았다. 이제 막 입사했는데, 마치 노장의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은 비행에 투입이 되었을 때도 계속되었다. 초년생들은 이코노미석에서 시작하는데, 나이 서른이 넘는 동료는 거의 없었다. 비즈니스석과 일등석에는 가야 조금 더 있었고, 사무장쯤은 되어야 과반수 이상이 서른을 넘는 정도였다.

승무원들의 연령대가 어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만 21세부터 지원 가능하다 보니, 이 나이 즈음에 일을 시작하는 동료들이 수두룩했다. 또 다른 이유는 세계 각국에서 온 승무원들이 두바이에 정착해야 하는 특성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해 관두거나, 적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3-5년 후에 이직이나 결혼 등을 이유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겨 퇴사율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빈자리는 또다시 어린 승무원들로 채워졌다.


에미레이트 항공 홍보 이미지

퇴사율이 높은 덕에 진급은 빨랐다. 내가 관둘 때 즈음 총 승무원 수가 2만 명을 넘었으니 승무원의 규모로 치면 우리가 잘 아는 대한 항공보다 세 배는 더 컸고, 그 안 빵꾸가 난 수많은 자리를 메우기 위해 간혹 원치 않는 진급을 해야 하는 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주 가끔 마흔이 넘는 승무원들이 있었지만, 쉰 살을 넘는 승무원들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회사가 설립된 지 30년이 채 안되다 보니, 정년퇴직했다는 사람 이야기는 한두 번 정도 들어본 것 같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20-30대이다 보니 '정년퇴직'보다는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나, 일일 막장 드라마 같은 애인의 바람피운 이야기 등이 주로 대화거리였다.



평균 나이 45세, 에어 프랑스

파리에 살며 다시 승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 내 희망사항은 에어 프랑스에 취직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당시, 에어 프랑스는 정식으로 승무원을 채용하지 않은지 7-8년이 넘은 시점이었고, 이렇게 오랫동안 신입이 없다 보니 우연히 인터넷 뉴스에서 에어 프랑스 승무원들의 평균 나이가 45세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이 사실은 프랑스에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직장이든, 예를 들면, 그게 동네 식당이든 아니면 옷 가게이든 한 번 정직원으로 채용이 되고 나면 정년을 채우는 일은 프랑스에서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내가 에미레이트 항공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이용해 본 항공사가 바로 에어 프랑스였다. 에어 프랑스에 타면 내 동료들의 엄마, 아빠 뻘 되는 승무원들이 차분하게 일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내 수화물 칸 문을 닫는다거나, 음료를 건네준다거나 하는 사소한 동작들이 너무 노련해서 무슨 춤의 한 동작 같아 보였다. 그리고 승객들과 수 천 번은 주고받았을 간단한 대화들은 노래하듯 쉼표 없이 흘러나왔다. 에미레이트 항공이 젊은이들의 동아리 모임 같은 분위기라면, 에어 프랑스는 어른들의 비즈니스 모임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승객을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기내방송을 듣고 난 후면, 나는 중년의 에어 프랑스 승무원들에게  왠지 모르게 더 신뢰가 갔다.

 


핀에어 홍보 이미지



하이힐을 신은 할머니 승무원.

핀에어에서 다시 승무원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신선했던 것은 서비스를 마치고 난 후 동료들과 갤리(비행기 안 승무원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에서 하는 대화들이었다.


"언제 입사했댔지? 작년에 내 딸도 입사했는데."

그날 가장 신참이었던 내게 동료 승무원이 건넨 말이었다.


"이게 다 내가 꾸민 거야, 마당 나무에 전구를 하나하나 다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핸드폰에 담긴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 그녀는 주머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썼다.


8월의 어느 날엔, 비행 전 브리핑 룸에서 두세 명의 승무원들이 속닥속닥하다가 키득키득 웃으며, 그맘 쯤이면 핀란드 숲에 가득 피는 블루베리를 따느라 보랏빛으로 물든 손톱을 감추느라 부산스러웠다. 그리고 비행기에 타서는 내 후년에 있을 정년퇴직 후 계획으로 수다의 주제를 옮겨갔다.


백 살이 다 되어가는 이 회사의 동료들 중에는 할머니(할머니의 기준을 몇 세에 둬야 할지 애매하지만, 상상 속의 '호호 할머니'와 이미지가 비슷하면 할머니라고 가정하자) 승무원들이 꽤나 많다. 그녀들은 일상에서 버스를 타면 마주칠만한 머리숱이 별로 없고 자세가 구부정한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미란다 프리슬리가 배역을 맡은 편집장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기도 한다.  


"나는 몇 살쯤 정년퇴직을 할 수 있을까"

그녀들의 대화에 끼고 싶어 내가 던진 질문이었다.


"글쎄, 정년퇴직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 넌 한 65, 66살?

저 나이까지 직장이 보장된다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건강하게 살아만이라고 있었으면 좋겠다. 만감이 교차했다.


기내 밖에서는 무조건 하이힐을 신어야 했던 이 전 회사와 달리 지금의 회사는 유니폼의 선택에 있어 자유롭다. 모자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되고, 스카프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신발 또한 하이힐을 신든 단화를 신든 자유다. 그럼에도, 헬싱키에서 일본의 후쿠오카로 가는 긴 비행 내내 하이힐을 신고 있는 호호 할머니가 있었다. 나는 그녀가 깜빡 잊고 단화를 챙겨 오지 않은 줄 알고 안쓰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자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는 항상 하이힐을 신어. 습관이 되어서 하이힐도 단화만큼 편한걸, 그리고 유니폼에는 이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


안 보이는 속옷도 겉옷과 깔맞춤을 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녀는 지난 30년간 하이힐을 고집해왔나 보다.



퍼펙트 랜딩 Perfect Landing.

코로나로 인한 장기 휴식을 마치고 비행에 복귀하기 위해 재교육에 임하는 중이었다. 내가 속한 그룹은 남자 한 명과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 승무원 열아홉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에는 연차가 꽤 되는 사무장도 네 다섯 명 포함되어 있었다.


비상 착륙을 실습하는 시간.

실습장에는 실제와 같은 사이즈의 모형 비행기가 설치되어 있고, 탑승구 밖으로 비상탈출 시 자동으로 펴지며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슬라이드가 바닥과 연결되어 있는 상황. 비행기를 탈출해 미끄럼틀 타듯 슬라이드를 내려가는 실습이었다.

슬라이드 끝에는 안전상 바닥에 쿠션을 깔아 놓는데 비행기 높이가 좀 있다 보니 착지할 때 충격과 쿠션의 반격을 받아 몸이 튕겨 나갈 수 있어 조금 긴장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2-3미터 앞 쪽 벽에 또 다른 쿠션을 붙여 놓았다. 잘못 착지하면 착지하는 순간 몸이 앞으로 튕기고 그 앞 쿠션에 얼굴을 처박게 되기 때문이다.


입사해서 처음 이 훈련을 받을 때에는 생각보다 비행기가 높아 겁을 먹기도 했지만, 어쨌든 한 이상의 경험이 있는 우리 그룹은 차례를 지켜 다들 능숙한 자세로 아래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각각. 우스꽝스러운 착지 모습들이 속출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열아홉 명의 승무원들이 탈출을 하고 모두의 시선은 다시 위로 향했다. 드디어 마지막 한 명이 비행기 출구 밖으로 나타났다. 누가 봐도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승무원이었다.

그녀는 정석대로 양 손을 교차해 팔을 감싸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슬라이드에 앉아 출발. 속력이 붙자 바람의 저항으로 단발머리가 휘날리니 마치 승객들을 모두 탈출시키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구하는 영웅의 모습이 연출되었다. 드디어 도착지점, 발이 바닥에 닿을 때쯤 그녀는 마치 낙하산을 펴듯 교차했던 팔을 양쪽으로 힘차게 쭉 벌렸고, 막 땅에 닿은 다리는 살짝 부들부들했지만 엉덩이로 균형을 잡으며 스쿼트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기계 체조 선수가 블링을 마치고 마지막 착지 동작을 하는 것처럼 그 자세를 몇 초간 유지했다.

그때 누군가가 "퍼펙트 랜딩"하고 소리쳤고, 우린 마지막 탈출자에게 보내는 박수를 쏟아냈다.


어깨가 구부정해져 키가 분명 센티는 줄어 들었을 그녀를 만일 비행기에서 마주친다면 누군가는 분명 '아니, 어떻게 아직도 이 일을 하지' 하고 생각하겠지. 그녀가 얼마나 중심을 잘 잡는지, 다리 힘은 또 얼마나 파워풀한지 모르고. 비행기에 터뷸런스(이상 기류로 기체가 흔들리는 현상)가 일어날 때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을 사람은 정작 자신인지도 모르고.


39년 근속 후 정년퇴직한 승무원의 마지막 비행. 출처: 핀에어 공식 인스타그램 @feelfinn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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