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들이 탑승하기도 전, 승무원들은 승객의 성함과 성별 등의 기본 정보는 물론, 유아와 아동, 휠체어 이용자, 단체 여행객들의 가이드, 국가 간에 양도되는 범죄인 등의 좌석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비행 시 증상이 발생할 수 있는 병력이 있는 승객들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승객 본인이 좌석을 예매할 때나 공항에서 체크인을 할 때 항공사에 미리 알려준 정보다. 이러한 것들은 승무원들이 비행 전 브리핑을 할 때 다시 한번 공유하고, 만약의 상황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
뇌질환이나 심장마비를 앓은 경험이 있다던가 당뇨, 특히 발작이나 쇼크에 이를 수 있는 저혈당의 경우 더욱 그렇다. 미리 알려주면, 비행 중 승무원들의 보호뿐 아니라, 증상 발생 시 즉각적인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다.
간혹 너무 사소해서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말하기 꺼려지는 증상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비행 공포증 (Aerophobia)이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헬싱키로 돌아오는 비행이었다.
키가 훤칠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탑승 중 우리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는 비행 공포증이 있어요"
하얀 파카에 검정 헤드폰을 끼고 있던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청년들과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 중 한 명은 그의 좌석 번호를 재빠르게 어딘가에 적었다.
핀란드 국내 비행이나, 가까운 유럽을 왕복하는 비행을 하다 보면 이와 같은 승객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어린 소녀부터 덩치가 산만한 남성, 노인까지 다양하다.
땅 덩어리가 크고, 러시아와 스웨덴 빼고는 다른 국가들과 육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핀란드에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비행기를 이용해야 할 때가 있다 (러시아 국경은 전쟁으로 인해 현재 막힘). 비행 공포증을 극복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비행 공포증'이라는 것이 아주 가볍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주위에서 누군가가 이런 증상이 있다고 한다면 당신을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예라이~ 촌놈아'
뭐 대략 이런 반응 아닐까.
보통 시골의 노인들이 흔한 말로 '차멀미' 때문에 차를 못 탄다고 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자동차 공포증(Amaxophobia)' 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모두 영어로는 포비아(Phobia)라는 말이 붙는데, 일종의 병에 해당하는 '공포증'이라는 뜻이다. 물론 나는 의사가 아니니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다.
비행 공포증을 호소한 승객들은 기내에서 다양한 증상들을 보인다.
특히 이륙이나 착륙을 할 때 극심한 불안증세를 보이는데,
손을 떨기도 하고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울기도 한다.
비행 공포증을 알려 온 한 승객을 이륙 전, 승무원과 마주 보고 앉는 비상구 옆 좌석으로 옮겨 준 적이 있다. (승무원과 함께, 그리고 비상구 옆이라는 사실이 불안감을 덜어 주기도 한다.)
비행기가 강한 엔진 소리를 내며 이륙을 시도하자 책을 꽉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굳어지는 듯했고, 급기야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바로 옆에 일행이 있었는데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본인이 '비행 공포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박동 수가 빨리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니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고 호소하는 승객들 중 일부가 이에 속한다.
증상의 원인은 어려가지가 있다.
비행기라서가 아니라 단순히 '폐쇄 공포증' 일 수도 있고, 높은 고도에 대한 두려움, 비행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과거 안 좋았던 비행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 등 이유는 다양하다.
이러한 승객들에게 우리 승무원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단순하지만,
의사가 처방해 주는 자낙스(Xanax)와 같은 신경 안전제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바로 그 불안함을 진정시켜주는 일인데, 그 공포증을 당신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곁에 있으니 '함께'싸워 극복해 보자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나는 이전에도 승무원 경험이 있지만, 현재 항공사에서 일하기 전 까지는 비행 공포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런 증상을 잘 인지하여 솔직하고 용감하게 알려주는 승객들과 이를 대처 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있다.
핀란드북부의 한 도시 끼띨라(Kittilä))에서 탑승한 키가 작고 볼이 빠알간 30대 중반의 여자 승객이 '비행 공포증'을 알려왔을 때는 그녀가 막 탑승 했을 때였다.
우리 승무원들은 아직 문이 활짝 열려있는 조종석으로 그녀를 안내했고 두 명의 파일럿을 소개해주었다. 그러자 두 파일럿은 그녀에게 이날 헬싱키까지의 비행은 어떤 고도로 어느 지점을 지나서 비행할 것인지, 날씨로 인해 기내의 흔들림은 어느 정도 예상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 이 내용은 우리 승무원들도 이미 브리핑 때 전달받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더 안심할 수 있도록 파일럿과 대화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간 후, 이륙 전에 한 승무원은 그녀에게 농담을 건내며 긴장을 풀어 주었고, 비행 중에는 또 다른 승무원들이 돌아가며 그녀 옆 빈 좌석에 앉아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그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다.
코펜하겐에서 탑승한 하얀 파카를 입은 훤칠한 청년은 앞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박다시피 하고 앉아, 비행 내내 귀에서 헤드폰을 떼지 않았다.
마치 그의 병을 아주 잘 이해하는 듯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는 일행들은 그에게만은 말을 걸지 않는 듯했다. 승무원들 또한 이륙 전에는 돌아가며 그와 사소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가 헤드폰을 다시 낀 이후로는 그를 예의주시하기만 하고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평소보다 심한 터뷸런스(turbulence; 난기류로 인한 기내 흔들림)가 발생했다.
터뷸런스는 웬만한 비행에는 한 번쯤은 발생할 만큼 흔한데, 보통은 물이 가득한 물컵에서 한 모금만 마시면 물이 넘쳐흐르지 않을 정도로 가볍지만, 심할 경우에는 기내식이 담긴 무거운 카트가 날아가고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안전벨트 등이 켜졌고, 터뷸런스에 관한 안내방송이 기내에 울려 퍼졌다. 그 위험성을 가장 잘 아는 승무원들은 재빠르게 앉고 승객들 또한 천천히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내가 평소와 달리 아주 무섭게 흔들렸다. 여기저기서 뒤늦게서야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터뷸런스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정도는 승객들 마다 다른데, 그 전의 비행경험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는 안전벨트 등이 켜진다고 해도 그 정도가 미약하기 때문에 비행 경험이 많은 승객들도 아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행기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아래위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맨 뒤에 앉아 기내를 바라보는데 거구의 북유럽인들의 몸이 들썩거릴 정도.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소리가 들렸고, 몇 명의 승객은 정말 롤러코스터라도 탄 양 양팔을 위로 올리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승무원들은 하얀 파카를 입은 훤칠한 청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의 불안감을 없애주기 위해 건넸던 따뜻한 말 들, 공든 탑이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비행기 맨뒤편에 앉은 승무원들은 급하게 세워놓은 음료 카트가 고꾸라지지 않도록 앉은 채로 붙들고 있어야 했고,
극심한 터뷸런스는 몇 분간 계속되었다.
안전벨트 등이 꺼지자 마자, 우리는 그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는 여전히 헤드폰을 낀 채로 바닥을 보고 앉아 있었다.
'이봐요'
그의 엄마뻘쯤 될 만한 우리 승무원 한 명이 그가 귀에서 헤드폰을 잠시 벗도록 했다.
"내가 거의 20년을 넘게 비행했지만, 이런 심한 터뷸런스는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당신도 우리 모두도 무사하네요. 이걸 견뎌내다니,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