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Yonu Nov 20. 2019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고등학교 선생님 2

재수 없이 뒤집어쓴 거치곤 열일곱 여고생 가슴이 너무 아팠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야, 너 아까 교실 돌아다녔지!


야간 자율학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야자를 마치기 약 20분 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온용으로 입고 있었던 체육복을 탈의했다. 어차피 교복 위에 입어둔 것이어서 그냥 자리에서 탈의만 하고 앉았다. 그동안에 우리 반 다른 학생 하나가 아예 자리를 떠서 나와 똑같이 체육복을 탈의하더니 짐을 챙겨 교실을 나갔다. 나중에 안 것이었지만 그 학생은 학원 일정 때문에 미리 선생님과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때 나는 그 학생은 신경도 안 쓰고 남은 20분을 공부하는데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 앞문이 열리더니 처음 보는 온통 잿빛 인상의 남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까 이반에서 체육복 갈아입은 사람 누구야! 


했다. 그건 나였기에 


"전데요" 했다. 그러자 그는 


너 내가 아까 다 봤어! 체육복 갈아입고 교실 활보하는 거 다 봤어!
누가 그러라고 했어! 


라며 나를 윽박질렀다. 나는 당황했다. 그건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아닌데요"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웃음이 터졌다. 나의 문제점이라면 웃지 말아야 할 때 웃는다는 것과, 웃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 때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자 선생님은 더욱 열이 받았다. 


무슨 소리야! 니가 아까 체육복 갈아입었다며! 


그래서 나는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네, 체육복을 갈아입은 건 저 맞는데요, 교실을 돌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이게 뭐가 웃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또 웃었다. 하긴, 사춘기 소녀들은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는다고 하더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잿빛 얼굴은 더 검어졌고 그는 내게 매우 신경질적으로 


너 나 따라 나와! 


하고 소리쳤다. 그제야 아이들은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웃음을 멈췄다. 참 도움 안 되는 인간 군상들. 


나는 교무실로 끌려가 그와 계속 논리 전쟁을 벌여야 했다. 아니, 여기서부터는 내가 진짜 체육복을 갈아입고 교실을 활보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에게 쪽팔림을 줬다는 게 내 죄목이 되었다. 나는 존X 억울했다. 답답했다. 

그래도 예의 바른 학생이 되기 위해서 선생님께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 시간은 이미 밤 11시였다. 일단 풀려나올 수 있었다. 내 책가방을 꺼내려 교실에 돌아가니 이미 교실은 불이 다 꺼져있었고 주번은 문을 잠그고 집에 간 상태였다. 울음이 나왔다. 


참 바보 같은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 학생. 학원 간다고 먼저 나갔던 학생. 얼굴 잿빛 선생은 그 학생과 내가 헷갈린 것이다. 진즉에 우리 둘을 헷갈리셨던 거라고 말했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까. 울면서 집에가며 나는 억울해서 내일이라도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학기 초였는데 벌써부터 교무실에 불려 가서 선생님들께 다 찍혔으니 이제 학교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부터 됐다. 2008년부터 소위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내신, 논술, 수능'을 도입해 수시 비중이 높아졌고 내신을 잘 받으려면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망했구나 싶었다. 이제 대학은 어떻게 가지. 창피하고 겁부터 났다. 


나는 다음날까지 시달려야 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반 급우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고 공개처형을 했다. 


아침에 교무실에서 들었다. 네가 잘못한 거야 안 한 거야.

...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교무실로 끌려갔다. 나는 교무실에 끌려가서 볼멘소리로 "샘, 그거 저 아니에요 OOO이랑 저랑 그 샘이 헷갈리신 거예요."라고 굉장히 불퉁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께 쪽을 줬다는 것, 그게 내 죄였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아마 하필이면 이미 무기명 투표 선동범으로 몰렸던 전력이 있어서 더 나를 때려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1학년 1학기 새 학기니까 선생님들은 기선제압용으로 일단 한 명을 두들겨 패려고 벼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하필 재수 없게 나였고. 그렇다고 다 이해하기엔 그때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패려면 진짜 못된 애를 패지. 왜 나같이 열심히 하려는 애를 두들겨 패냐. 그때는 정말 유서라도 써놓고 자살하고 싶었다. 그 정도였다. 


누구에게나 첫 단추는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나. 그런데 내 고등학교 첫 단추는 이상하게 다 어그러진 채 끼워졌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유난히 암흑 같았다. 아마 그래서 대학에 가서 보상심리로 그렇게 놀아재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화가 난다. 




예의없는 세상 시리즈를 묶어 책으로 냈습니다! '여느 예의 없는 세상 생존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폭주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