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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Aug 27. 2019

프랑크푸르트의 밤, 두 노숙자들의 이야기

프랑크푸르트의 밤. 그날은 기분이 유난히 좋았다. 친구와 헤어진 뒤 호텔에 돌아와 이 밤을 더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밖에 나갔다.




내가 숙박한 호텔은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근처로 한국인 다른 여행객들 사이에선 위험하다고 평가받는 곳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근처에는 역시 노숙자와 약에 취한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어슬렁거린다. 하지만 온갖 약물이 난무하는 밴쿠버에서 이미 노숙자와 약쟁이들에게 이골이 난 내게는 두려울 것 없었다. 외려 역과 가까워서 편리했다.


밖으로 나서자 두 명의 노숙인이 분주하게 무언가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다가갔다. 웃으며 “하이”하자 자기들도 웃으며 “하이”한다. “그거 뭐야?”하고 피우는 것을 물어보니 '크랙'이란다. 크랙은 코카인에 다른 약물을 섞은 것으로 알고 있다. 코카인이 너무 비싸 피우지 못하는 이들이 찾는 차선책이라고.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많이 유통되는데 큰 문제가 되는 약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는 크리스토퍼고 얘는 알렉산더 야”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리햅을 알아보고 있어”라는 말도 덧붙이며. 나는 리햅 얘기가 나오니 반가웠다. 거짓말 일진 모르지만 그래도 약물에 의존된 자신들이 자랑스럽지는 않다는 것 아닌가. 





크리스토퍼는 18살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다녀왔다고 했다. 독일도 한때는 징병 국가였고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했으니 크리스토퍼의 나이와 맞춰보면 거짓말은 아닌듯하다.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은 크리스토퍼에게 밥을 달라거나, 사탕을 달라는 것 대신 늘 ‘펜’을 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펜을 주면 그걸로 벽에 그림을 그렸다고. 항상 마음이 짠했단다. 그 모습을 보면서. 파병을 다녀온 뒤 크리스토퍼도 힘이 들었고 거리로 흘러들게 됐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는 연신 알렉산더를 “닥터, 닥터”라고 불렀다. 진짜 의사는 아니지만 의대에서 공부한 적은 있다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알렉산더의 영어가 짧아 많이 알 수는 없었지만 알렉산더는 여자 친구와 아들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거리에 머물고 있으니 아들을 볼 수 없다고. 그래서 꼭 리햅 가서 치료받고 아들을 만나라고 했다.

둘은 내게 “절대 크랙은 하지 말아라”라고 당부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후~ 너는 절대 이거 하지 마라”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진지하게. 전에도 어떤 여자가 크랙 피워보겠다고 자기한테 제의했다는데 절대 안 된다고 했었단다.


약은 어디서 구하냐고 했더니 홍등가 쪽에 가면 흑인들이, 언제나 흑인들이 판다고 했다. 나를 데려가 구경도 시켜주었다. 친구들 주려고 사둔 시가가 있었는데 한 개비를 알렉산더에게 주니 신이 나서 시가를 피웠다. 프랑크푸르트의 길바닥에 셋이 쪼로록 앉아 알렉산더는 시가를 피우고, 크리스토퍼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올드보이”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는 “아! 그거 대사 있잖아,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올드보이에 나왔던 이 대사는 사실 미국 여류 시인의 시다. 나도 정말 좋아하는 시인데 알렉산더가 읊으니 나도 참 반가웠다.


우리는 함께 사진도 찍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메일로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알렉산더는 자기 이름으로 구글에 치면 자기가 썼던 논문들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치매 등에 대한 연구를 했었다고.

그가 준 풀네임으로 검색해봤지만 아직 이렇다 할 자료는 찾지 못했다. 아마 독일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우연히 만나 말동무가 됐던 두 노숙자들 덕분에 그날 밤도 소중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함께 셀피도 찍었다. (내가 나온 부분은 잘라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던 마지막 날에 아마도 크리스토퍼를 다시 암 마인 역 근처에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는 척은 하지 못했다. 그의 걸음은 매우 빨랐고 약에 취했던 그 밤이 그의 기억에 없을까 봐 나도 약간 두려웠던 것이다. 다음에는 함께 웃고 싶었는데. 부디 지금은 리햅에서 재활 중이기를...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슬프고 늙은 세상은 기쁨을 빌려가려 할 뿐,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허덕인다.


노래하라, 언덕이 화답할 것이다.

한숨 쉬어라, 허공에 사라질 것이다.

메아리는 단지 즐거움의 소리에만 화답하고

근심 어린 목소리에는 기어들 것이다.


즐거워하라, 사람들이 너를 찾을 것이다.

애통해하라, 그들은 등을 돌리고 떠날 것이다.

네 즐거움은 모두가 원하겠지만,

네 근심은 아무도 원치 않는다.


기뻐하라, 네 친구가 많으리라

슬퍼하라, 모두 잃으리라

네가 권하는 달콤한 와인을 거부할 사람은 없겠지만,

삶의 쓴잔은 홀로 마셔야 한다.


만찬을 열어라, 집이 가득 찰 것이다.

단식을 해라, 세상이 너를 지나쳐 가리라.

성공과 자선은 네 생을 돕겠지만,

어떤 이도 네 죽음을 지킬 수는 없다.


길고 화려한 무리를 위해 마련된

즐거움의 회당은 넓지만,

반드시 지나가야 할 좁은 고통의 통로는

한 명 한 명씩 정렬해 지나가야 할 것이다.


- 엘라 윌러 윌콕스 '고독'


크리스토퍼가 읊었던 시, 엘라 윌러 윌콕스의 시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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