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베를린은 정말 더웠다. 화장은커녕 썬크림도 제대로 바르지 않고 밖에 나간 나는 기어코 얼굴에 썬번을 입고 말았다. 얼굴이 따끔따끔해서 만져보니 손에 느껴지는 그것은 아아, 물집이여. 잠시나마 피부가 가라앉을 것을 바라며 스타벅스로 피신했으나 피부가 가라앉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이상태로 지하철을 타러 가다간 상황만 악화될 것 같아서 결국 우버를 불렀다.
우버 드라이버의 이름은 모하메드. 내가 탑승하자마자 대뜸 "두유 해브 보이프랜드?"부터 묻는다. (Do you have a boyfriend가 맞습니다. 참고로.) 하... "노"하니까 "칠드런?" 또 "노" 하니까 "허즈밴드?" 나의 대답은 또 "노"
이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다. 내가 캐나다와 한국에서 숱하게 겪었으며 아랍 여성이 직접 증언한 바에 따르면 아랍 남성들은 언제나 굉장히 여자를 밝힌다. 막상 자기네 동네 여자들에겐 히잡을 강요하고 순결을 강요하면서 남의 동네 여자들은 어떻게든 꼬셔보려고 하는 모습은 정말 모순적이다. 그는 냉담한 나의 태도에 어떻게든 내 환심을 사보려고 자기는 태권도를 할 줄 안다, 나는 한국인 승객들을 몇 번 태워봤다는 둥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거짓말이 아랍 남성의 기본 패시브임을 잘 아는 나는 "그래, 그렇구나"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만 했다.
그의 작업이 먹혀들어가지 않는다고 판단한 그는 딴에는 비장의 무기라고 생각했는지, 그만 내가 펄쩍 뛸 소리를 했다.
"나 독일 여권 있어!"
"나 독일 여권 있어!"
"나 독일 여권 있어!"
"나 독일 여권 있어!"
"나 독일 여권 있어!"
기분이 확 상했다.
나도 알고 있다. 이 지구 상엔 의도치 않게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하는 나라에 태어나 사랑 없는 결혼을 통해 그 나라를 '탈출'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그 여성들을 비하하려는 건 아닌데 지금 이 남자가 감히, 대한민국 여권(女權과 旅券, Women Rights와 Passport)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가뜩이나 목소리도 큰 난데 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마! 나도 한국 여권 있다! 한국 여권 세계 3위다! 세계 3위! 미국 여권이랑 동급이다! 독일 여권 몇 윈데!
마! 너거 메르켈 베를린 살제? 내가 임마! 메르켈이랑! 싸우나도 가고! 마! 밥도 먹고! 다했어!"
(범죄와의 전쟁 최익현 씨 빙의)
그와의 드라이브를 마치고 나는 그에게 최하 평점을 주었다. 고객과 flirting(이 단어는 언제나 마땅히 번역할만한 한국 단어를 못찾겠다)을 시도한다고 적고싶었는데 아쉽게도 따로 내 의견을 적을수는 없었다.
다시는 대한민국 여권을 무시하지 마라.
후에 독일인 친구들에게 이 에피소드를 말했더니 가끔 장난으로 독일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긴 한다고 했다. (맙소사) 그렇다고 그런 말을 그렇게 대놓고 직접 한 경우는 처음 들어봤다고 미안하다고 자기들이 사과했다. 뭘 너희가 사과하니. 어휴. 그 남자는 메카에 기도하며 반성했으면 좋겠다.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