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아이 모임은 점차 체계를 갖춰갔다. 가칭이던 '어른아이 모임' 대신 '어른아이 권리 보장 협회(Association for the Protection of Adult Child's Rights)'로 이름을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협회는 약칭 APAR로 불렸다. 아이를 의미하는 Child는 약칭에서 뺐다. 회원들이 '어른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우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협회원들은 언젠가는 '어른아이'라는 단어도 꼭 없애버리자고 결기 했다.
어느 독지가의 후원으로 어른아이들의 신체·정신 건강에 대한 의학 연구 프로젝트에도 돌입했다. 전쟁으로 장교였던 아들을 잃은 그는 "당신이 누구 건간에 내 아들의 전우였다"라며 거액을 기부했다. 그 외에도 어른아이들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십시일반 활동 기금을 후원했다. 어른아이가 아님에도 APAR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른아이를 싫어한다고 믿어왔던 지석-데이비드는 쏟아지는 도움의 손길에 처음으로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APAR의 활동이 잦아지자 정부의 방해 속에도 회원수는 빠르게 늘었다. 민준-테일러도 합류했다. 지석-데이비드는 재윤-제임스와도 잘 지냈다. 정부의 인센티브만 받고 지석-데이비드를 내쫓은 그의 가족들과 달리 재윤-제임스는 지석-데이비드를 아들처럼 아꼈다. 재윤-제임스는 많은 어른아이들이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이 시기 지석-데이비드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활동 중에 민서-맨디를 만나게 된 것이다. 민서-맨디는 재윤-제임스의 딸로 아버지와 함께 APAR에서 활동했다. 민서-맨디는 지석-데이비드가 혜율-헤일리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듬어줬다.
다만 두 사람은 협회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협회 활동 중 몰래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비밀연애의 스릴도 즐겼다. 지석-데이비드는 자신이 어른아이가 아님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행복했다. 그래서 때때로 지석-데이비드는 민서-맨디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하기도 했다.
"유치원은 어떤 곳이야?"
"웃고 떠들고 울고 선생님을 졸졸 쫓아다니는 곳이야. 밥을 안 먹는다고 선생님을 애먹이는 애들도 있어. 장난감 블록들로 작은 집을 짓고 궁전이라고 호사를 부리기도 하고 모래성을 쌓고 해적으로 변신도 하고 하루 종일 놀고 상상 속에서만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 곳이지"
"초등학교는?"
"글쎄, 초등학교 1학년은 거의 유치원생이랑 비슷한데 5~6학년쯤 되면 공부할 게 많아져서 슬슬 재미가 없어지지"
"사춘기는 어땠어?"
"나? 여드름이 엄청났어. 그거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몰라. 부모님한테 반항도 해보고, 부모님보다 친구들을 더 쫓아다녔어. 그땐 내가 이미 다 큰 줄 알았거든. 돌아보니 영락없는 어린애였는데 말야"
"아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석-데이비드는 민서-맨디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의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을 겪어보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아쉬움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민서-맨디는 의도치 않게 지석-데이비드를 의기소침하게 만든 것 같아 그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APAR 활동을 하는 거야. 아빠의 영향도 있지만, 당연히 누렸어야 했던 것들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도록. 나는 너를 포함해 어른아이들에게 항상 많이 미안하고 또 감사해. 네가 전선을 지켜준 덕에 나는 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지금은 평화도 즐길 수 있게 됐잖아.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민서-맨디의 솔직하고 따뜻한 위로에 지석-데이비드는 공연히 그녀에게 부담을 준 것이 아닌가 하고 미안해졌다.
"아냐, 네가 뭐가 미안해.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한 건데. 맘대로 되지도 않고"
실제로 지석-데이비드는 불쑥불쑥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화가 날 때마다 '세상은 어차피 불공평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을 눌러왔다. 전쟁에서 안타깝게 총탄에 스러지는 전우들을 보며 이를 뼈저리게 느꼈고, 전쟁이 끝난 후의 세상에 녹아들기 위해서도 그는 늘 저 생각을 상기해 왔다.
"민서야 그거 알아?"
"뭐?"
"널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는 거"
"아 뭐야 갑자기"
사춘기 소년 같은 지석-데이비드의 고백에 민서-맨디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정말이야"
표현이 서툴렀을 뿐, 지석-데이비드는 진심이었다. 민서-맨디도 이를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지석-데이비드는 처음으로 '정말 행복하다'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