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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Aug 08. 2021

마트 옆 안전지대

  자전거를 타고 기숙사를 나온다. 바로 보이는 공원 옆 육교에 오른다. 천천히 가다 보면 넓은 공터가 보인다. 그곳을 빠르게 지나간다. 목적지가 보인다.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간다. 명랑한 안내방송이 들린다. "오늘도 저희 이온몰을 들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트 코너에 있는 가게로 곧장 다가간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감돈다.내가 좋아하는 가게, 카르디다.




   부모님 곁을 떠나 자취를 시작한 지 4년이 되던 해, 나는 서울보다 더 먼 곳으로 옮겨갔다. 일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해 학기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대학교 4학년생에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학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었다. 3년 동안 대학에서 좋은 학점을 받은 것도 아니고, 괜찮은 스펙을 쌓지도 못했다. 유일하게 내세울 거라곤 일본어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일본어를 살리기로 한 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3학년 겨울 방학,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부모님이 주신 용돈까지 차곡차곡 모아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과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여행이 아닌 생활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는 것도, 다른 문화와 시스템을 배우는 것도 하나의 과제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나에겐 버스카드 충전조차 도전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버스카드를 따로 충전하는 곳이 없었다. 버스가 잠시 멈춘 사이에만 운전기사님에게 말을 걸어 충전해야 했다. 처음엔 나의 행동이 틀릴까 겁이나 먼저 유학온 선배에게 부탁했다. "왜? 그냥 너가 하면 되잖아?"라는 말이 가슴에 꼿혔다. 충전조차 쉽게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작아보였다. 내 발로 유학온지 1개월.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건 일본에 산 지 1개월이 지났을 때부터였다. 그 당시 환율이 100엔에 1500원이라 부담이 심했다. 매일 밥을 사 먹으면 금방 잔고가 바닥날 것 같았다. 엄마가 보내준 무말랭이도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기숙사 바로 옆에는 큰 쇼핑몰이 있었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빵, 라면, 냉동식품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고, 식재료는 1인분씩 잘 포장 되어있었다. 점점 할 수 있는 일본요리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요리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진 못했다. 


 쇼핑몰에 안에 있는 마트에서 나올 때면 신경 쓰이는 가게가 있었다. '카르디 커피 팜'이라 적힌 파란색 작은 간판이 달린 곳이다. 가게 앞에 나둔 몇 개의 오크통과 가판대에는 영어로 적힌 과자나 사탕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곳을 지나칠 때면 은은한 커피 향이 맡아졌다. 부드러운 재즈음악이 들렸는데, 쇼핑몰 가게중에서도 눈에 띄게 이국적이었다.


  하루는 가게 앞에서 직원이 작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나눠주었다. 아메리카노를 잘 마시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받은 서비스 커피라 기분이 좋았다. 쓸 것 같았던 아메리카노는 생각보다 고소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씩 마시며 가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커피 팜이라고 적혀 있어 커피 원두만 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매장 한 곳에서는 원두를 팔았지만, 대부분 진열장에는 해외 식료품도 가득했다. 동남아시아부터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식재료까지 구역을 나눠 진열되어 있었다. 


  '혹시 한국 식재료도 팔진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진열장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있었다. 중앙 진열장에는 봉지라면부터, 과자, 음료수, 고추장, 간장 같은 소스까지 보였다.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제품도 있었다. "요뽀끼"와 같은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혹시 떡볶이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재빨리 떡볶이 떡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파는 떡은 찹쌀이라, 따뜻한 물에서 모양이 퍼져 늘어난다. 그 떡으로는 도무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 수 없었다. 다행히 쌀 떡은 금방 눈에 띄었다. 떡과 고추장을 산 뒤 기숙사로 가는 길. 나는 사막 한가운데서 보물을 찾은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숙사로 돌아가 레시피를 찾았다. 15분 정도 걸렸을까, 인생 첫 떡볶이가 완성됐다.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맛은 새콤했다. 케첩을 너무 많이 넣었다 보다. 그래도 좋았다. 떡 몇 개를 더 집어먹으니 마음 한구석이 먹먹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타지에서 애쓰는 나 자신에게 주는 첫 한국음식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자주 카르디에 갔다. 동네 유일하게 한국 제품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그곳에서 주는 따뜻한 커피도 좋았다. 그곳에서 산 떡으로 만든 떡볶이는 유학시절 나의 숨은힘이었다. 일본 친구들에게 대접하는 나만의 무기가 되기도 했고, 힘들 때 나에게 주는 보상이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그 마트 옆에 카르디가 있는지 살핀다. 이제는 더 이상 살 것이 없지만 시간 내어 둘러본다. 적응하려 애썼던 나의 유학시절, 이곳은 나만의 안전지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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