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15분 거리에 큰 사거리가 있다. 사거리를 중심으로 제법 큰 상가 건물이 줄지어있다. 사거리 정면의 편의점을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부산 은행이 보인다. 위층에는 그 학원이 있다.
그 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반 친구를 통해서였다. 국영수를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는데 그곳에 다니고 나서 성적이 제법 올랐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곧장 부모님을 설득해 학원을 옮겼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영도는 학구열이 높은 곳은 아니었다. 부산에서 가장 노인이 많은 동네로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같은 부산사람들조차 영도를 보는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태어나고 자란 동네였지만, 도무지 영도의 분위기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섬이라서 안개가 자주 끼었는데 마을의 분위기도 스산했다. 바다 위로 뿌연 안개가 가득 퍼져있을 때면, 마음 한 구석도 잠식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교에는 공부를 하는 학생보다 노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쉬는 시간 여자화장실에도 자주 안개와 비슷한 것이 보였다. 그 안개를 보고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런 공간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조용히 공부를 했다. 좋아서라기 보단 학생이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것이 공부였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나는 엉덩이를 오래 붙이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암기과목은 특기 중 하나였고, 제법 성적이 잘 나왔다.
그렇게 공부에 재미를 붙이던 참에 그 학원을 알게 된 것이다. 학원은 다른 곳과 전혀 달랐다. 평일에도 3시간씩 수업이 있었고, 숙제를 하지 않았으면 새벽 2시까지 집에 보내지 않았다. 선생님도 열정이 넘쳤다. 영도에서 처음으로 더 나아지고 싶은 사람들의 갈망을 본 것 같았다. 학생들은 내가 학교에서 본 이들과는 달라 보였다. 에너지가 있었고, 목표가 있어 보였다.
수업 진도는 순식간에 나갔고, 숙제는 매일마다 쌓였다. 학원에서 맞이한 방학은 더 놀라웠다. 특훈 기간이었다. 매일 100개씩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주말에도 학원에서 수업과 자습을 했다. 한 번은 새벽 두 시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엄마가 학원으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빠는 당장 그런 학원은 그만두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만 둘 수가 없었다. 학원에 가면 영도와 다른 공기가 흘렀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원장 선생님이 계셨다. 수학전공인 그는 중고등학생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가끔 대학에서도 수업을 한다고 했다. 덥수룩하게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에 검은 피부, 구김 있는 셔츠를 바지에 대충 집어넣은 모습은 영락없는 시골 동네 아저씨였다. 하지만 눈빛은 이상하게 빛이 났다. 첫 방학에는 그의 특강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 왜 고등학교 1학년 수업을 미리 들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분의 수업을 들으면 싫어했던 수학을 열심히 해볼까 싶어 졌었다. 그분에게는 사람을 끄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은 수업이 끝낼 때, 자주 이런 말을 하셨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마라
너의 인생은 네가 살아야 하는 거야
남에게 소중한 걸 맡겨선 안된다"
선생님은 버릇처럼 이 말을 반복했다. 나는 이상한 아저씨의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흘려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어느 틈엔가 내 인생에 녹아들었다. 아마 처음 그 말을 들어 때 무의식적으로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해야 한다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나는 그 신념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영도를 벗어나는 일부터 시작했다. 성적을 올려 해운대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이후도 서울로 독립을 했고 , 그 뒤 일본,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난 뒤엔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의 말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매사 결정할 때도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혼자 감당한다는 건 외로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린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기 전에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마라'는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