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리허설인가, 위험한 도박인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거’라는 단어를 함부로 꺼내기 어려웠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고, 결혼 전 함께 산다는 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 쉬웠죠. 저 역시 결혼할 당시만 해도 그랬습니다. 시댁에서는 “남의 귀한 딸 데려와서 그러는 거 아니다”라며, 결혼식을 나중에 올리더라도 혼인신고는 반드시 먼저 하라고 당부하셨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제 주변 친구들 중에도 동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결혼 날짜를 잡고, 혼인신고와 함께 집을 합쳤죠.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작은 돈카츠 가게를 운영하는데,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오는 젊은 친구들 중 ‘동거 중’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동거는 한 번쯤 해볼 만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습관처럼, 아무 계획 없이 시작하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와 ‘그저 헤어지기 아쉬워서 시작한 동거’는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요.
결혼 전 동거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함께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생활 패턴, 집안일 습관, 금전 감각, 갈등 대처 방식 등은 데이트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부딪히고, 함께 하루를 살아보면 그 사람이 어떤 성격과 가치관을 가졌는지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결혼 전 동거’에 찬성하는 편입니다.
다만, 전제가 필요합니다.
동거 중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겨도 (예를 들어 임신이나 경제적 어려움)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동거를 시작해야 합니다. 책임 없이, 재미나 호기심으로만 시작한 동거가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요?
결혼 전 동거는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시험 기간’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후회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함께 살아볼 이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입니다.
그 준비가 되어 있다면, 결혼 전 동거는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혼 전 동거, 준비 체크리스트
동거를 왜 하는지, 목적이 같은지 확인
(결혼 전 확인 기간인지, 단순 편의인지)
결혼 계획 시기와 구체적 로드맵 공유
서로 기대하는 ‘관계의 목표’가 일치하는지 확인
월세/관리비/공과금/식비 등의 분담 방법 합의
공동계좌 개설 여부와 사용 규칙
개인 저축·비상금 운영 방식
예상치 못한 지출이 발생했을 때의 대처 방법
집안일 분담 (요리, 청소, 빨래, 쓰레기 등)
기상·취침 시간, 생활 소음, 정리정돈 습관
손님 초대나 외부 활동 관련 기준
집 안에서의 개인 공간·개인 시간 존중 여부
다툼이 생겼을 때 대화 규칙 정하기
감정이 격해졌을 때 휴식 시간 두기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겠지’라는 기대 버리기
갈등 후 화해·정리 절차 만들기
각자의 친구·가족 관계 유지 방법
혼자만의 시간과 취미 활동 보장
SNS·메신저 공개 여부 등 사생활 기준 합의
아플 때·부상당했을 때 간호 범위
실직, 수입 감소 등 경제 위기 대응
임신·유산 가능성에 대한 입장 공유
갑작스러운 관계 종료 시 정리 절차
동거 계약서(비공식이라도 생활 규칙과 권리·의무 작성)
전입신고 여부, 세금·보험 문제 확인
공동 구매 물품·가구 소유권 명시
� 전문가 팁:
결혼 전 동거는 ‘결혼 연습’이 아니라 ‘관계 실험’이기 때문에, 시작 전에 충분한 대화와 합의가 필수입니다.
연애 때의 환상만으로는 함께 사는 현실을 버티기 어렵습니다. “사랑”과 “생활”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동거를 통해 가장 먼저 배우게 되죠.
동거에서 가장 큰 걱정은 아무래도 준비되지 않은 임신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 부모가 될 준비는 당연하고도 필수예요. 물론 요즘은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Childfree/Childless by choice) 선택도 분명한 삶의 방식입니다. 중요한 건 둘의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합의가 말이 아니라 구체적 계획으로 내려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출산 의사·시기: “우리는 아이를 낳을까? 낳는다면 언제?”
피임 계획: 어떤 방법을,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실수 발생 시 대응도 포함)
예상치 못한 임신 시 시나리오: 의료·경제·정서적 지원 플랜, 양가와의 소통 원칙
생활 기반: 주거, 수입 안정성, 육아휴직·돌봄 네트워크 가능 여부
요즘 예능이나 다큐에서 동거→결혼 이후 숨겨진 빚이 드러나 ‘사기 결혼’으로 번지는 사례를 종종 봅니다. 사랑보다 먼저 숫자를 점검해야 하는 이유예요.
“나를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내일을 지키는 최소한의 절차입니다.
빚 현황 표(월 상환액·총액·금리·만기) 서로 공유
보증·연대보증 여부(부채가 본인 명의가 아니더라도 위험 요소)
신용등급/카드 연체 이력 간단 공개
공동비 지출 원칙·한도(공과금, 식비, 가구·가전 구매)
혼전합의서(프리넙) 또는 동거 계약서: 공동구매 물품 소유권, 해지 시 정리 절차까지
약을 복용 중이거나 치료 이력이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공유해야 합니다. 낙인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트너의 안전과 회복을 함께 설계하기 위해서예요.
복용 약·진단명·담당의 정보 기초 공유(필요 범위 내)
위기 시 신호·대응 매뉴얼(휴식, 상담, 병원 동행 등)
건강검진·상담 계획을 ‘우리의 캘린더’로 가져오기
타임아웃: 감정이 과열되면 20분 휴지 후 재개
금지어 설정: 인신공격·과거소환·비하 금지
같은 팀 언어: “너 vs 나”가 아니라 **“우리가 풀 문제”**라는 프레임
아이 앞 사과 모델링: 갈등 후 “엄마·아빠가 이런 점에서 미안해”라고 수습까지 보여주기
정치색이 안 맞아 반복적으로 부딪히는 커플을 많이 봅니다. “가족끼리는 정치 얘기 하지 말자”는 우스갯소리엔 이유가 있어요. 특히 아이가 생기면 교육·복지·안전 이슈로 정치가 곧 생활이 됩니다.
토론 룰: 주 1회 30분, ‘사실-해석-감정’ 구분해서 이야기하기
금지 주제/선거철 디톡스: 선거 기간엔 정치 대화 시간·빈도 제한
공통가치 찾기: 서로의 ‘최종 목적’(아이의 안전, 가정의 안정 등)을 먼저 합의
합의 불가시 결론: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훈련
말로만 합의하면 기억이 달라집니다. 짧은 문서 한 장이면 충분해요.
동거 합의서(요약)
목적: 결혼 전 동거/생활 적합성 확인
기간·리뷰 주기: 예) 6개월, 매달 1회 점검
재정: 공과금 분담·공동구매 소유권·비상금
집안일: 항목·주기·대체 규칙
갈등: 대화 규칙·타임아웃·중재자(부부상담/지인)
건강: 약·상담 공유 범위·위기대응
임신: 피임·임신 시 대응·양가 소통 원칙
종료: 계약해지 사유·보증금·짐 정리·연락 차단/유지 원칙
인터뷰 1 — "결혼 전 동거가 우리를 구했다" (34세, 회사원)
“저희는 연애할 때 너무 잘 맞았죠. 그런데 막상 동거를 시작하니 저는 아침형, 그는 완전 야행성이어서 충돌이 많았어요. 그 과정을 통해 리듬을 맞추는 방법을 알게 됐어요. 이걸 하지 않았다면 1년 안에 깨졌을지도 몰라요.”
인터뷰 2 — "동거는 사랑을 갉아먹기도 한다" (29세, 프리랜서 디자이너)
“처음엔 사랑만 믿었죠. 그런데 동거하며 소비 습관이나 가치관 차이가 너무 컸어요. 미래가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준비 없이 시작한 동거는 사랑보다 관계 피로를 쌓는 선택이었어요.”
인터뷰 3 — "동거는 결혼의 예행연습" (40세, 자영업자)
“북유럽에선 동거가 거의 결혼의 일부였어요. 한국 돌아오면서 아내와 2년간 동거했죠. 부모님 반대가 있었지만, 가족 문화부터 명절 갈등까지 다 겪어보고 결혼으로 간 게 실제 도움이 됐어요.”
동거는 사랑의 연장이 아니라 생활의 실험입니다.
시작은 로맨스로도 되지만, 유지와 마무리는 모두 책임의 언어로만 가능해요.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거는 두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고, 준비가 없다면 사랑을 가장 빠르게 소모시킬 것입니다.
� 국내 인식 변화 도표
2005년: “결혼 전 동거 수용” 15%
2024년: “결혼 전 동거 수용” 54%
“결혼과 무관하게 동거 가능” 응답 30%
(출처: HRC Opinion 2024)
[그래프 삽화 컨셉]
미국: 동거 경험자 59% / 유지율 평균 59%
한국: 대학교 1년 내 동거율 21.1%, 장기 결혼 유지율 통계는 아직 축적 중
� 미국 사례
약혼 전 동거: 결혼 실패율 34%
약혼 후 동거: 결혼 실패율 23%
(출처: Wikipedia Cohabitation)
결혼 전 동거는 사랑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지만, 준비 없는 동거는 오히려 관계를 소모시킵니다.
사랑이 결혼의 필요조건이라면, 책임과 준비는 결혼의 충분조건입니다.
결혼만큼 진지하게 동거를 대할 때, 비로소 그 시간이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자산이 됩니다.
전문가 코멘트
심리상담사 L 씨:“동거는 사랑의 시험장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같이 사는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불편한 질문을 나눴는지가 중요합니다. 돈, 가치관, 가족 문제 등은 피하기 쉽지만, 결혼 후에는 반드시 부딪힙니다.”
결혼 전 동거는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관계를 시험대에 올리는 과정입니다. 생활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는 사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장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안에는 돈, 가치관, 건강, 가족, 미래라는 현실적인 대본이 쓰여 있죠.
동거를 시작하는 순간,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생활 파트너’로서의 책임이 시작됩니다. 같이 웃고, 같이 먹고,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끝맺는 그 모든 순간이 — 결혼이라는 장기 계약의 축소판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 전 동거를 결심했다면,
로맨스보다 먼저 대화를, 설렘보다 먼저 합의를, 그리고 사랑보다 먼저 책임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랑은 동거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책임은 동거를 지속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 힘을 갖춘 사람만이 동거를 통해 결혼으로, 그리고 결혼을 통해 평생의 동반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명언 한 줄
"사랑은 시작의 이유가 되고, 책임은 끝까지 가게 만드는 힘이다."
"함께 사는 건 하루를 공유하는 일이지만, 함께 살아내는 건 인생을 나누는 일이다."
"좋은 동거는 결혼의 예행연습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대다."
결혼 전 동거는 단순한 ‘같이 사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서로의 속도와 리듬, 기쁨과 불편함, 그리고 때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까지
모두 녹아 있습니다.
연애의 설렘은 한순간이지만, 함께 사는 현실은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집니다.
저는 독자 여러분께 “사랑만으로 충분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사랑은 분명 관계를 시작하게 하는 불씨이지만, 그것을 꺼뜨리지 않게 지키는 건 준비와 책임입니다.
동거를 고민하고 계신다면, 로맨틱한 순간보다 먼저 불편한 대화를 나누시길 권합니다.
돈, 가치관, 가족, 건강, 갈등 대처 — 쉽지 않은 이야기일수록 미리 꺼내놓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가장 큰 안전망이 됩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든, 관계의 실험이든, 중요한 건 서로를 깊이 이해하려는 의지입니다.
그 의지가 있다면 동거는 사랑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것이고, 준비가 없다면
그 시간은 관계를 소모시키는 시한폭탄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평생 연애만으로 행복하고, 누군가는 동거를 거쳐 결혼으로 나아갑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그 선택이 서로의 존엄과 미래를 지키는 선택이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랑을 오래 지속시키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아름다운 방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