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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상자

제1부 - 일종의 머리말 (1)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문학동네

by 유병천


엄청난 책을 선물로 받았다. 첫 페이지를 읽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갔다. 집중력을 높여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 여기서는 어떤 일도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대서양 상공에 기압계상 최저기압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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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2. 특성 없는 남자의 집


하루종일 조용히 자기 갈 길을 가는 한 시민의 근육이 하는 일은 하루에 한 번 시합에서 막대한 중량을 들어올리는 역도선수의 근육이 하는 일보다 훨씬 많다. 그것은 생리학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니까 자잘한 일상적 수고도 그 사회적 총량 면에서, 그리고 그 합산의 적합성 면에서 세상에 투입하는 에너지가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훨씬 크다. 결국 영웅적 성과라는 것은 과대망상식 발상으로 산 위에 올려놓은 모래알처럼 지극히 미미할 뿐이다. 그는 이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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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소중함이 혹은 평범하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커다란 이슈에 묻혀 쉽게 잊히는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 가진 힘은 잘 표현되지 않는 위대함이다.


3. 특성 없는 남자에게도 특성 있는 아버지가 있다


아무리 계산속이 밝은 인간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조화로운 인간에 비하면 절반의 성공도 거두지 못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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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소중함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변하지 않는다. 아울러 조화로움은 균형 잡힌 사람을 의미하거나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을까.



4. 현실감각이 있다면 가능성감각도 있어야 한다


현실감각이 있고, 누구도 그것의 존재 타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가능성 감각이라 불릴 만한 것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
가능성감각을 가진 사람은 예를 들어, 여기에 이런저런 일이 일어났고,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낸다. 여기선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났어야 하거나 일어났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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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감각이란 단어가 생소하다. 살면서 현실감각이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가능성감각이란 언어는 처음 접하는 것 같다. '어쩌면 다를 수도 있었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다음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현실성인간과 가능성인간을 쉽게 구분하고 싶다면 일정한 액수의 돈을 떠올리면 된다. 가령 어떤 가능성이 내재해 있을지언정 천 마르크의 돈은 누가 그걸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천 마르크다. 장미 한 송이나 한 여자를 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또는 네가 갖고 있다고 해서 천 마르크에 무언가가 더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실성인간은 말한다. 바보들은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어두기만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고. 심지어 여자의 아름다움도 누구의 여자인지에 따라 가치가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다.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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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돈과 자본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머니에 넣어두면 돈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재화를 생산해 내면 자본이듯 말이다. 같은 돈이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특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의 실재로 인한 모종의 기쁨을 전제로 하기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조차 현실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를 특성 없는 남자라고 여기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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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의 속성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다. 모종의 기쁨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5. 울리히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말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라는 위협적인 문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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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언어이다. 울리히는 내면을 알기도 전에 판단해 버리는 것을 위협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울리히는 진정으로 마음 깊이 다가오지 않는 사안에서는 늘 그랬다. 머릿속 착상들이 아무 관련 없이 뒤엉키거나 중심 없이 확산되어 나갔다. 이것은 현대의 특징이자, 통일성 없이 무작위로 불어나는 특이한 현대 기하학의 본질이기도 했다.
-28

아무런 관련 없는 생각의 꼬리가 이어지는 것이 현대의 특성인가? 그래서 무의미한 생각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거였나? 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6. 레오나, 혹은 관점의 이동


교제가 시작되자 레오나는 시대에 맞지 않는 또 하나의 특성을 드러냈다. 바로 엄청난 식탐인데, 그것은 오래전에 유행이 지난 악덕이었다. 식탐은 채우지 못한 욕망의 해방에서 비롯되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해 생긴 한을 지금 푸는 것이다. 그 행동에는 마침내 자신의 새장을 부수고 스스로에 대한 지배권을 쟁취한 이상(理想)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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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에도 식탐이 시대에 맞지 않는 특성이었다니. 이 책을 읽으면 현대에 사는 내가 미개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만나는 명문장은 '경구의 공작소'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알 수 있다.


7. 약한 상태에서 울리히가 새 연인을 끌어들이다

오늘날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타인에게 불편한 대립각을 세운다. 인간이 자기 집단 바깥의 사람을 뿌리 깊이 불신하는 것은 문화의 근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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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혹은 '울타리'가 생각나는 문장이다. 집단 바깥의 사람을 불신하는 것이 문화의 근본 특징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충돌의 원인도 결국 이러한 특징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포츠는 거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자잘하게 흩어져 있는 보편적 증오가 스포츠 경기를 통해 표출된다고도 볼 수 있죠. 하지만 당연히 그 반대 주장도 가능합니다. 스포츠는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동무나 그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결국 본질적으로 보면, 거칢과 사랑은 화려하고 말없는 큰 새의 양쪽 날개만큼도 떨어진 사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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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글을 쓰면서 정말 부러운 문장이 많다. 거칢과 사랑은 화려하고 말없는 큰 새의 양쪽 날개만큼도 떨어진 사이가 아니라니. 신학을 스포츠에 비유해서 이야기하는 문장이 시선을 멈추게 한다.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를 좋아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방대한 분량이라 완독 후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도 궁금하다. 여러 번 읽고 싶은 문장들을 담아두고 싶다.


8. 카카니엔


사람들은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이루려 한다.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더이상 없다. 성취가 영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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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표가 최대치를 이루려고 함에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나름의 꿈과 목표 혹은 욕망 등의 이름으로 그것을 이루려고 하니까. 과정과 결과가 모두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성취라는 언어에서 더욱 명료해지는 느낌이다. 성취감이 자신감을 만들고 자신감이 자존감을 만들어 행복의 영혼을 만들 테니까 말이다.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문장으로 인해 완독의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글을 쓴 사람을 생각하고 10년이란 시간 동안 이 책을 놓지 않고 번역한 사람을 생각하며 끝까지 읽을 것이다. 이건 자신의 게으름과 싸우고 싶은 일종의 다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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