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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 일종의 머리말 (2)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문학동네

by 유병천
엄청난 책을 선물로 받았다. 첫 페이지를 읽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갔다. 집중력을 높여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8. 카카니엔


어떤 일이 어떻게 될지는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 상상은 줄곧 우리를 따라다니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감정이 반영된 여행 판타지 같은 것이다. 그런 판타지는 피상적이고 가변적이고 단기적이다.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우리 모두를 위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p46


미래는 알 길이 없다. 지나간 과거도 일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같은 사건이나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계획을 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감정은 이미 그 상황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계획에서 실행 그리고 기억까지 더해지면 그것은 상상에서 현실에 되어버린다. 모든 일이 계획한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도 의지가 전해져 생전에 실행하지 못했던 계획을 실행하기도 한다. 여기엔 그 방향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흔들리는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도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속도에 얽매여 산다. 밤낮으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모든 일도 빠르게 처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를 둘러싼 네 벽이 고정돼 있는 것처럼 면도하고 밥 먹고 사랑하고 독서하고 업무를 본다. 섬뜩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 벽들이 움직이고,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길고 굽은 더듬이처럼 벽의 레일이 계속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는 시대의 열차가 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힘들에 속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무척 모호한 역할이다. 제법 긴 휴식 끝에 밖을 내다보면 우리는 풍경이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스쳐 지나가는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간다. 달리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순응하려고 해도 이미 목표를 지나쳤거나 잘못된 길로 빠진 듯한 불쾌한 감정이 점점 힘을 얻는다. 그러다 어느 날 폭풍우처럼 거센 욕구가 생긴다. 내려! 당장 뛰어내려! 아울러 누군가 막아주기를 바라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고, 이제 제자리에 멈춰 서기를 원하고, 길을 잘못 들기 전의 갈림길로 다시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인다!
-p46~47


변화는 소리 없는 벽처럼 다가온다. 변화의 속도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빨라졌다. 때론 원하지 않는 길을 갈 때도 있다. 마치 시대의 소명이라는 듯 의식하지 못한 채 따라가다 문득 돌아가고 싶어질 때도 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인생에서 어쩌면 뒤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등산하다가 갈림길에서 잘못 선택한 길로 들어섰다면, 다시 지도를 확인하고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한 나라의 현상을 단순히 그 국민들의 성격으로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틀렸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최소한 아홉 가지 성격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적 성격, 민족적 성격, 국가적 성격, 계급적 성격, 지리적 성격, 성별에 따른 성격, 의식적 성격, 무의식적 성격, 개인적 성격이 그것이다. 국민 개개인은 그 성격들을 자기 속에 통합하고 있지만, 성격들이 그를 해체해버린다. 개인은 원래 이런 많은 도랑으로 생성된 작은 웅덩이일 뿐이다. 웅덩이로 흘러들어 간 도랑물은 다시 흘러나와 다른 개천들과 합쳐져 또 다른 웅덩이가 된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주민에게는 열 번째 성격이 생기고, 그 성격은 채우지 못한 공간들의 수동적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이 판타지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지만, 단 한 가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최소 아홉 가지는 되는 성격들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되든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엇이 자신을 채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누구나 인정하듯, 설명하기 어려운 이 공간은 이탈리아든 영국이든 색깔과 형태가 다르다. 각각의 공간에서 부각되어 나오는 것의 색깔과 형태가 상이한 탓이다. 그러나 여기든 저기든 똑같은 공간도 존재한다. 판타지가 떠나고 남겨진 작은 장난감블록 도시 같은 현실이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텅 비고 보이지 않는 공간이 그것이다.
-50


텅 비고 보이지 않는 공간은 허무를 의미할까? 장난감블록 도시 같은 현실 속에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 많음 속에서도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허무주의를 경계하라는 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무언가를 규정짓고 판단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도 똑같은 공간이 존재한다니 그것의 이름은 허무나 외로움이 아닐까? 사람마다 수명이 다른 것처럼 그 공간을 마주하는 시기만 다를지도 모를 일이다.


9. 위대한 남자가 되려는 세 가지 시도 가운데 첫번째 시도


돌아온 이 남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위대한 남자가 되려는 의지로 충만하지 않았던 시기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 울리히는 이 소망을 갖고 태어난 듯했다. 그런 소망에는 허영과 무지도 한몫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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