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문학동네
제1부 - 일종의 머리말 (3)
엄청난 책을 선물로 받았다. 첫 페이지를 읽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갔다. 집중력을 높여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불변의 ‘항수’는 없고 ‘함숫값’만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모든 일의 좋고 나쁨이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고, 모든 인간의 가치가 그 특성을 평가할 정신공학적 기술에 달려있다면,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두고 수천 년 동안 벌여온 온갖 잡설에 귀기울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인간 간의 모든 관계는 비실용적이고, 인간들이 일하는 방식은 지극히 비경제적인데다 부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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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분야에 시스템화를 목격하며 산다. 1930년대의 작품이란 것을 상상하면 함숫값이란 기계화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과학기술이 시대의 흐름을 장악하면서 가치관의 변화가 이어졌다. 유럽에서 사람이 우선인지 논리가 우선인지의 모호함은 우리나라보다 빠르게 시작된 것 같다. 상황적 지식이나 인간관계마저 수치화되면서 철학이나 윤리가 뒤로 밀린 느낌이다. 현대의 인공지능 등의 붐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한 컴퓨팅 기술의 판단이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이다. 이와 반대로 윤리와 철학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는 문장이 담고 있는 무게를 생각해 본다. 과연 저런 관점을 가진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판단을 맡겨도 되는 것일까?
인간은 미래의 예언으로서 지상을 거닌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시험이자 실험이다. 행위 하나하나는 다음 행위에 의해 추월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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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자본의 시대를 표현하는 데에 이렇게 멋진 문장이 있을까. 어제 이룬 성과도 내일에 의해 묻힌다. 오늘 출시한 신제품은 미래에 출시할 신제품에 의해 뒷전으로 밀린다. 빠른 속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현대는 자신의 힘으로 달리는 천천히 달리는 두 발 자전거가 아니다. 시속 300km/h의 속도로 달리는 고속열차에 탑승한 상태이다. 이대로 가면 더 빠른 속도로 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의 위아래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을 알아내는 것이 근원적 꿈의 실현이라면, 그리고 빛, 온기, 힘, 즐거움, 편안함이 인류의 근원적 꿈이라면 오늘날의 연구는 단순한 과학을 넘어선 마법이자, 신으로 하여금 외투의 단추를 하나씩 풀게 하는 심장과 뇌의 가장 강력한 힘이자, 그런 힘이 만들어내는 제의이자, 단단하고 용기 있고 유연하고, 칼처럼 날카롭고 냉철한 수학적 논리학이 교리를 관통하고 떠받치는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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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과 발견이 근원적인 꿈일까? 인류는 빛, 온기, 힘, 즐거움, 편안함을 찾는 존재라는 점은 공감한다. 결국 많은 인간의 행위가 이를 이루기 위함일 테니까 말이다. 연구를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다음 페이지에 이 책 뒤표지에 실린 기가 막힌 문장이 나온다.
사람들은 현실을 얻고 꿈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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