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상자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1)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문학동네

by 유병천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20. 현실과의 접촉. 특성의 결핍에도 울리히는 과단성 있고 열정적으로 행동하다


백작이 그에게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수학자라고 답했다. "음, 흥미롭군, 어느 학교에 있나?" 이어진 질문에 울리히는 학교와는 연을 맺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음, 그것도 아주 흥미롭군, 나도 알지, 학문이니 대학이니 하는 것들을." 울리히는 현 상황이 마치 대화극처럼 친숙하고 편하게 느껴져 부지불식간에 그만 집에 있을 때처럼 행동하면서, 상황에 맞는 사회적 규범이 아닌 자기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갑자기 머릿속에 모스브루거가 떠올랐고, 바로 이곳에 은총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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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슈탈부르크 백작을 만나러 가서 울리히는 불쑥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살인범 모스브루거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백작에게 울리히는 수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어떤 순간이 매혹적으로 느껴질 때 편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친구한테 고민을 털어놓듯 이야기할 때가 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순간도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21. 평행운동의 진정한 발명자 라인스도르프 백작



거룩한 어둠은 그 자체로는 한없이 명백하지만, 인간의 지성에만 눈멀고 어둡게 느껴질 뿐이었다. 게다가 누군가 위대한 일을 할 때는 그 자신도 대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그의 삶의 신조이기도 했다. 크롬웰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가장 멀리 가는 법이다!” 따라서 라인스도르프 백작은 자신의 상징에 푹 빠져 만끽하고 있었다. 상징의 불확실성이 어떤 확실성보다 강하게 그를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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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보다 목적 없이 갈 때 가장 멀리 갈 수도 있겠구나. 하긴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린 인생이란 가장 긴 여행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위대한 일을 하려는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그는 심지어 진정한 사회주의는 자신의 신념과도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자들이 자기 진영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일부 숨기고 있던 가장 내밀한 생각이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기사의 의무이고, 진정한 고위 귀족의 눈으로 보면 시민계급 출신의 공장주건 노동자건 큰 차이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저 가슴 깊은 곳에서는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다”라는 말은 그가 좋아하는 문구였다. 그렇다고 이 말을 무슨 대단한 의미로 해석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저승에 가면 신분 차이가 없다는 정도로만 이해했다. 어쨌거나 그가 보기에 속세에서는 이 신분적 차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노동자들도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이 신분적 차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노동자들도 물질적인 영역에서 욕구를 채워주기만 하면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비이성적 구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각자 정해진 계층 안에서 의무를 다하고 발전해 가는 자연스러운 세계 질서를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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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스도르프 백작은 불편한 정치가를 떠올리게 한다. 울리히는 이런 라인스도르프 백작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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