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유리. 투명하고, 약하고, 벽을 만들기도 하고, 거울처럼 나를 비추기도 하고, 그런데 깨지기 쉽기도 하고, 모래가 주원료라서 그런 지, 깨지면 모래처럼 되는 것 같고, 강화유리, 접합유리, 안전유리, 종류도 정말 많고, 더러워지더라도 물로 닦으면 다시 깨끗해지지만, 깨지면 붙이지 못하는 것이 유리다. 아끼고 아껴서 성이라도 쌓을 듯 소중하게 다룬 유리지만, 결정적인 순간 이미 깨진 유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이현의 낭만적 사회와 사랑은 발랄하다. 다리, 입술 정도는 티가 나지 않으니 괜찮지만, 유리성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 그 유리성을 지키는 문은 낡은 면팬티이다. 팬티 살 돈이 없어서 좋은 팬티를 안 사는 게 아니다. 위기의 순간이 오더라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부적인 것이다. 머리는 나빠도 돈이 좀 있어서 차를 몰고 다니는 남자이냐, 국내 최고의 의과대학을 다니는 머리 좋은데, 돈이 없는 남자냐. 둘 다 갖추고 있는 남자는 없나? 그런 남자에게 나의 유리성을 줄 거야.
작중 여자는 자신의 여성을 이용해서 남자를 만나려 한다. 주인공의 잘못된 성(性)에 대한 인식과 거짓된 욕망은 실패로 끝난다.
부모가 바라는 자녀의 모습과 자녀의 실제 모습과의 차이는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일요일 아침식사만은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속물근성 속에서 자란 두 딸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도 여성의 유리성에 관한 부모의 생각은 일치한다. ‘금이 가는 순간’, ‘그 순간 끝장나는 거야!’, ‘그렇지. 못 붙이지.’ 결과만 알려주고, 정확한 지식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부모가 자식에게 ‘성’에 관한 교육을 시키는 것은 어색하다. 자식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을 전달할 수 있을까?
정이현의 소설은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이다. 특히 여성이 감추고 싶어 하는 심리를 대놓고 묘사한다. 자신의 유리성을 지키기 위해서 오랄을 하는 주인공이나, 잠깐 실수로 임신을 한 친구가 나누는 대화는 생소하기까지 하다. 또한 여자의 눈으로 본 남자들의 속마음도 세밀하게 표현한다. ‘피가 한 곳으로 몰려 갑갑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망이 도대체 사랑이랑 무슨 관계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소설이 끝날 무렵. 잘 지켜왔다고, 생각했던 유리성을 바치던 날. 자신이 기대하던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남자가 준 명품 가방이 설마 짭퉁은 아니겠지. 자기 자신도 짭퉁이 아니라 정말 잘 지켜온 것인데. 명품 가방을 준 남자는 날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어쩐지 불안하다. 자신이 지켜온 ‘유리성’이 남자에겐 짭퉁 취급을 받고, 자신이 기대하던 남자에 대한 마음 역시 짭퉁은 아니었을까?
‘그의 옆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서, 나는 마음속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주인공은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뭔가 씁쓸하다.
유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