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 소리

숲이 익어가는 소리

by 뺑덕갱

풀숲 더미 속에서 귀뚜라미 알람이 똘망하게 들려온다. 쓸쓸하지만 궁상맞지는 않다. 발길 멈추고 가만히 들으면 밤에 조심히 켜는 한 줄의 하모니카 소리 같다. 조금 더 허리 숙이고 귀를 열면 아무개 풀벌레들 수다 떠는 소리가 별 가루처럼 풀숲 위를 떠다닌다. 가을 소리가 들린다.


새벽 동이 틀 무렵, 눈 비비고 하품 한 번하고 비몽사몽 냥이 밥그릇에 사료를 붓는다. ‘잘 잤어, 어서 먹어!’ ‘덜그럭 덜그럭’ 싼쵸 밥 먹는 소리가 덜 깬 잠을 쫓는다. 쪼그리고 앉아 ‘기특하다.’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고 베란다 문을 열면, 가을 새벽바람이 훅 몰려 들어온다. 청명하고 기분 좋은 새벽 손님이다. 가을 해는 늦잠을 자는지 밖이 컴컴하다. 청어 빛 새벽 속에 쌀쌀한 이른 바람 피해 웅크린 뒷동산이 어스름하다. 부지런한 새들 소리만 일찌감치 반짝반짝 들려온다. 하늘에 해가 차오르면 뒷동산 터줏대감인 까마귀 한 쌍이 푸닥거리며 바쁘게 가을 숲을 들락거린다.


길가에 풀들이 발등을 스쳐가며 바스스한 목마른 소리를 낸다. 어느 틈에 물을 들였는지 풀 끝머리가 노르스름하게 멋을 부렸다. 연보라, 연분홍 가마 탄 새색시의 수줍은 얼굴처럼 곱디고운 빛으로 한껏 분칠 한 들꽃들도 가을 무대 위에서 한들거린다. 붕붕 어디선가 작은 모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통통한 벌 한 마리가 꽃 머리 뒤에서 숨바꼭질 중이다. 새까만 털에 노랑 띠가 선명한 예쁜 옷을 입었다. 숲에 눈을 두니 그곳에 모여 사는 생명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게 헤벌쭉 입이 벌어지고 웃음이 난다.


지난봄, 하얀 꽃무리를 피워냈던 그 찔레나무에 알롱달롱 콩알만 한 빨간 열매가 탐이 나게 매달렸다. 산허리에 놓여있는 벤치에 잠시 엉덩이 붙이고 쉬었다 갈까? 했더니, 바지런한 산 개미들 차지다.

‘에잇, 입 바람을 불어 쫒아 버릴까?’ 마음 약해 잠시 곁에 서 있기로 했다. 산 아래쪽으로 눈을 돌리니 나무 사이로 네모난 눈구멍을 빠금거리며 아파트촌이 어른거린다. 오밀조밀 근사한 닭장 같다.


가을볕에 노릇하게 구워진 나뭇잎 한 장이 투두둑 소리 내며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고개 들어 보니 숲 머리가 파랑 하늘에 팔랑팔랑 떠다닌다. 먼 동해 바다를 밤새 품었다 왔나? 요즘 들어 유난하게 맑은 물빛이 도는 하늘에 그곳에 사는 내 친구도 그립다.


바람이 숲을 싸돌아다니면 비릿한 들깨 향도, 가뿐한 허브향도, 쌉쌀한 취나물 향도 난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갔던 먼 시골 친척집 근처 밭고랑에서 났던, 코끝이 훌러덩 벗겨질 것처럼 지독했던 똥 무덤 타는 냄새도 얼핏 섞여있다. 숲에서 태어나 숲에 묻힌 생물의 사체 냄새일까?


숲에 사는 바람은 신이 났다. 책가방 옆구리에 끼고 여학교 축제에 몰려가는 콧바람 든 남학생들처럼 들떠 다닌다. 하늘 끝에 매달린 나무 꼭대기에서 화사한 꽹과리 소리가 높게 휘날린다.


‘이게 뭐냐!’ 눈이 번쩍 띄었다. 입이 쩍 벌어진 토실한 밤 송아리 하나가 발아래서 알짱댔다. 눈을 멀리 두니 바늘 옷을 두툼하게 입은 송아리들이 고슴도치들처럼 숲 바닥에 뒹굴었다. 큰 바람이 숲과 우리 동네를 거세게 지나간 밤이 있었다. 그 등쌀에 상수리나무도 도토리를 잔뜩 토해 냈나 보다.

좀비처럼 몸을 숙이고 밤 세알을 털었다. 주머니에 넣을까 말까? ‘투두둑’ 숲이 또 소리를 냈다. ‘에그, 깜짝이야!’ 지난봄에 나를 훔쳐보고 간 청설몬가?

by 갱이

숲에 사는 바람, 풀벌레, 나무, 새들, 작은 동물들, 그들이 살아가는 소리는 신부의 품에 안긴 꽃다발처럼 화사하고,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귀하고,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꿈같고, 아마데우스 현악 4중주의 앙상블처럼 따뜻하고 조화롭다. 숲이 가을을 타고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오면 기쁘고 아쉽다. 시리게 아름답고 호강스러운 이 가을을, 나는 몇 번을 더 만날 수가 있을까? 내 딸, 콩여시와 우리 아이들의 세월 속에도 이 가을이 변함없이 찾아와 주면 좋겠는데…

by 갱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 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