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 하나가 우리 동네에 이웃하고 있다.
가파른 등을 타고 품에 들어서면 어린 동물들이 목을 축이고 갈 작은 시내도 골을 타고 흐른다. 그 품에 사 계절이 머물다 간다. 올해도 그곳에 봄이 찾아왔다.
'청명한 하늘을 담은 숲' photo 갱이꽃송아리 담뿍 눌러 담은 망울들이 비쩍 마른 나뭇가지에 터질 듯 들썩이며 앉아있다. 한숨 자고 나면 황량한 산등선 위에 개나리, 진달래, 찔레꽃들이 활짝 피어 생글 댄다. 또 한숨 자고 돌아보면 노오랑 꽃가루 뒤집어쓴 뒤영벌 한 마리, 꽃나무 독차지하고 신이 나서 '부릉부릉' 이 작은 산은 다복하다.
'5월의 숲에서 만난 뒤영벌' photo 갱이
어린 딸아이는 훌쩍 자라 청년이 되었고, 이 산은 사람들의 손을 타며 변해갔다.
나뭇잎 하나 둘 떨구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건너 가면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외로운 오솔길 하나 수줍게 길을 내어주었다. 봄을 지나 풍성한 여름으로 건너 가면, 마술처럼 그 길은 숲으로 숨어버렸다. 산 아래, 흐드러지게 풀어놓은 들꽃에 마음 뺏겨 한참을 숨죽이고 그 시간 속에 머물렀다. 먼 산 너머로 붉은 머리 풀고 돌아서는 해의 등을 타고 산 아래를 기웃대던 너구리와 꿩의 당근빛 그림자가 눈에 선하다. 숲에서 들려오던 딱따구리의 공허한 타악기 소리, 이제는 올드 송이 되었다.
한 해 한 해 변해가는 이곳이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낯선 곳이 되어 가는구나. 해가 바뀌고 봄이 또 찾아왔지만, 이 봄이 신나지 않는다.
어느 화장한 봄날, 요란한 기계소리와 차소리가 어지럽게 산을 에워쌓다. 몇 날이 지나갔을 때 산은 파헤쳐지고 낯선 길들이 산을 휘감았다. 발아래 그 오솔길에 머물던 어린 나무들과 새싹들이 밟히고 뜯겨 나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에 길이 지나가고 산새들의 날갯짓이 불안하다. 오솔길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오솔길' photo 갱이
드문드문 날아가는 흰나비의 날갯짓이 소용없고 커다란 봉지 가득 산나물 눌러 담아 가는 사람들의 등이 간지렵고, 씁쓸한 내 마음 어찌할 수 없다.
봄이 오면 잊고 있던 생명들의 들썩임에 설레고, 5월의 문턱에 서면 푸근한 봄바람에 한 보따리 실려오는 아카시아 꽃향기가 모두의 하루를 향기롭게 지켜주고, 밤나무 꽃향기에 가을 숲이 어지럽다. 여름이면 비바람에 얹어 오는 풀냄새, 흙냄새에 콧등이 알싸하다. 가을 오면 푸른 하늘 아래서 춤바람 난 황금빛 숲을 보며 덩실, 겨울 오면 산은 조용히 눈 속으로 숨는다.
'3월에 만난 진달래' photp 갱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photo 갱이
'다복한 숲' photo 갱이
'겨울 숲' photo 갱이
아파트 담벼락을 끼고 늘어진 덩굴나무 사이로 해마다 찾아왔던 뒤영벌이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두텁게 뿌려진 농약으로 번들거리는 나뭇잎을 보며 발길을 돌린다.
이 작고 소담스러운 숲이 그대로 머물러주면 좋겠는데, 변해가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거스를 수 없고, 잠시 머물다가는 나비처럼 나는 이 봄을 서성인다. 내년에는 눈 동그랗게 뜨고 입꼬리 하늘로 띄우고 꽃보다 더 활짝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고 싶다.
'불 켜진 숲, 잠 못드는 숲' photo 갱이
'여름 밤을 시작하는 무지개' photo 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