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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후, 아직 명절의 맛이 있다

1월 31일 출근길

by 박유재 Jan 31. 2025

  출근길 가로등이 꺼져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어둑하지 않다. 흐린 하늘은 얇아 금방이라도 구멍이 뚫리고 밝은 빛이 내릴 듯하다. 공기는 적당히 가라앉아 바람에 넘실넘실 흔들거린다. 며칠 사이에 세상이 변해 버렸다.


  버스에 올라 맨 뒷좌석에 앉았다.

  '오늘 출근길 표정은 어떨까?'

  여자 둘이 타더니 내가 앉은 바로 앞 좌석까지 와서 앉았다. 통로 쪽에 앉은 여자는 젊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파우더 팩을 열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얼굴을 세게 두드리는지 여자의 머리가 드드드드 움직거렸다. 그러곤 파우더를 한번 찍고 거울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마 한 곳에 톡톡톡, 다른 곳에 꼬옥 꼬옥 몇 번을 눌러대며 화장을 마쳤다.

  둘은 아무래도 모녀 같았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연회색 파카에 검은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적당한 길이의 단발머리가 검기만 하다. 검은색 등가방을 메고 손바닥만 한 크로스백을 더한 모습이었다. 젊은 여자는 카멜색 반코트를 허리벨트로 동여맸다. 어깨며 허리아래가 부풀어 풍성하게 꾸몄다. 여유 있게 펄럭이는 검은색 바지는 젊은 취향을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큼직하게 컬진 모양으로 등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칼도 풍성하니 반코트가 만들어 주는 윤곽과 어울렸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둘이 같이 걷는다. 키도 비슷하고 걸음걸이도 비슷해 보였다.

  '모발까지도 닮은 거네…'

  둘 다 운동화를 신고 사뿐사뿐 지하철 대합실로 내려갔다.

  승강장에서 두 여자는 어디에 설지 잠시 주춤거렸다. 둘의 행선지가 서로 다른 듯했다. 그들의 오늘 동행은 낯 설은 동행 같아 보였다.


  열차를 탔는데 조용하다. 승객들은 평소보다 적어서 객실 통로는 한산했다. 서있는 사람들이나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고 얌전히 앉아 있거나 이어폰도 없이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도 몇몇이 보였다. 고개를 뒷 벽에 붙이거나 철제 기둥에 기대고 눈을 감은 모습에서 휴식을 필요로 하는 마음까지 엿보였다.


  다음 정거장에서 젊은 중년의 한 여자가 탔다. 가방에서 큼직한 **패드를 꺼냈다. 13인치는 됨직한 노트북 만한 크기였다. 왼팔에 **패드를 얹더니 오른손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손톱만 한 캐릭터 얼굴들이 우르르 나타나고 한쪽에는 채팅 창 글들이 속속 나타나 줄줄이 올라가고 있었다. 여자는 자판을 띄우더니 글자를 톡톡톡톡 누르고 엔터 키를 치고 다른 조작들을 했다.

  게임인지 댓글인지 둘 다인지 이 정도면 진심인 것이 분명하다. 열차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눈길을 던지고 어떤 사람은 **패드 화면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기도 했다. 여자는 신당역에 도착할 때까지 주변에는 아랑곳없었다. 실컷 게임하는 모습. 며칠 동안 게임을 못 해서 얼른 따라잡으려는 건 아닐 까.


  여자의 뒤쪽으로 젊은 남녀가 탔다.

  "… 까지 가는 거지?"

  "응, ◇◇◇역이네."

  얼굴들은 서로 정감이 있는 표정인데 뭔가,

  '낯설어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듯한 모습, 오래간만의 만남에서 우연히 출근길을 알게 되어 어색한 동행까지 하게 된. 명절은 명절 이후에도 낯선 만남을 만들어 주는가 보다.

  여자는 오늘 여정인 듯한 몇 가지 얘기를 건네고 남자는 정답게 호응해 주었다. 눈빛도 표정도 긍정 일색이었다. 그러더니 뜸이 약간 생기고 대화가 신상 얘기로 넘어갔다. 여자가 요약 필기를 한 노트를 꺼내 보이고, 남자가 뒤적뒤적 자상하게 살펴봤다.

  "… 볼려고 그랬는데…"

  연휴의 다짐을 얘기하는 것일 까. 연휴에 하는 다짐은 욕심일 가능성이 높다.

  남녀의 대화는 조곤조곤 계속 이어졌다. 한 번은 여자의 딱딱한 말이 튀어 들려왔다.

  "그러니까 거, 개 싸가지 아냐."

  동의를 구하려는 남자의 얘기에 여자가 격한 반응을 했다. 남녀는 신당역까지 가는 짧은 시간 중에 어색함을 잠재우고 친숙함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2호선 신당역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승객들은 6호선보다 많았다.

  객실 통로에 듬성듬성 서있는 사람들 사이로 대형 캐리어가 보였다. 사면이 연한 금색으로 빛났고 모서리마다 진한 금색 보호판이 붙어 있었다. 캐리어 주인은 종이가방을 한 손에 들고 터질 것 같이 빵빵한 등가방을 메고 있었다. 신발은 오랜 걸음에도 피곤하지 않도록, 흡사 등산화같이 밑창이 울퉁불퉁하고 투박했다.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길일 까. 이 아침에 집으로 가는 걸 까. 아니면 바로 회사로 출근하는 것일 까. 명절 직후의 출근길에는 아직 명절의 맛이 붙어 다닌다.







출근길의 절실함에 끝은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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